정신의 힘으로 몸을 치유하는 법. 1장
같은 진단, 같은 치료인데 어떤 사람은 빨리 회복하고 어떤 사람은 지연되는 이유.
회복력, 기대, 의미, 관계, 성격, 트라우마 등 “보이지 않는 변수” 이야기.
병실 불이 희미하게 줄어드는 저녁,
간호사가 마지막으로 혈압을 재고 나가면
창문엔 도시의 불빛 대신
환자들의 숨소리가 천천히 떠오릅니다.
한 병실, 네 개의 침대.
그 중 두 사람은 같은 병, 같은 수술을 받았습니다.
나이도 비슷합니다.
같은 집도의, 같은 약, 같은 물리치료 스케줄.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눈에 띄는 차이가 하나 생깁니다.
왼쪽 침대의 A 씨는
며칠 지나지 않아 “혼자 걸어 보자”는 말을 듣고
조심스럽게 병실 복도를 한 바퀴 돕니다.
웃음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생각보다 할 만하네”라는 표정이 얼굴에 어렴풋이 비칩니다.
오른쪽 침대의 B 씨는
같은 날 수술을 받았지만,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이 몰려오고,
미래를 떠올리려 하면 가슴부터 먹먹해집니다.
의사는 “수술은 잘 됐고, 경과도 나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지만
B 씨의 마음에는
알 수 없는 무거운 그림자가 깔려 있습니다.
A 씨는 퇴원을 준비하고,
B 씨는 여전히 밤마다 뒤척입니다.
이런 장면은 실제 병실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병실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꼭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나는 저 사람만큼 빨리 낫지 못할까?”
“나는 회복도 느리고, 마음도 약한 사람인가 보다.”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똑같이 수술했는데, 쟤는 벌써 퇴원이야.”
“같은 병인데,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진단명, 수술법, 투약 내용, 입원 기간, 나이, 병원.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비교할 수 있는 겉조건입니다.
의학적인 설명도 대개 이 선에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의 회복이란,
눈에 보이는 조건들만으로 설명되기엔
너무나 많은 층위를 가진 과정입니다.
같은 수술대에 올랐더라도,
그 이전까지의 삶의 역사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누군가의 돌봄과 지지를 받으며 살아왔고,
어떤 사람은 늘 혼자 감당하며 버티는 법만 배우며 살아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 몸은 웬만하면 잘 회복한다”는
경험을 여러 번 쌓아왔고,
어떤 사람은 작은 병에도 크게 꺾이곤 했던 기억을 안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병이
“삶을 조정하라는 경고”로 느껴지고,
어떤 사람에겐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는 선언처럼 들립니다.
이 모든 것은
검사 결과표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지만,
회복의 속도와 질을 깊숙이 흔드는 보이지 않는 변수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보이지 않는 변수들을 모른 채
저울 위의 숫자들만 보고
스스로를 평가해 버리곤 합니다.
“나는 역시 약한 사람이다.”
“저 사람은 며칠 만에 일어나는데, 나는 왜…”
하지만 진실은 이렇습니다.
당신과 그 사람은
애초에 같은 출발선에 서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실패와 성공, 회복과 지연을 이야기할 때
너무 쉽게 “의지”라는 단어를 꺼냅니다.
“쟤는 의지가 강해서 금방 나았나 봐.”
“나는 의지가 약해서 늘 이런 식이지 뭐.”
의지는 분명 어떤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의지 하나만으로 설명하려는 순간,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놓치게 됩니다.
병실의 두 사람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A 씨는
치료가 시작되기 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서
이런 말을 여러 번 들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워낙 잘 이겨내는 사람이잖아요.”
“이전에도 큰 수술 잘 넘겼잖아요, 이번에도 해낼 거예요.”
스스로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 나는 그래도 잘 버티는 편이었지.”
몸은 아프지만,
마음 어딘가에는 작은 믿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반면 B 씨는
살면서 큰 병을 겪은 경험도 처음이고,
삶의 굴곡을 이야기해 줄 누군가도 많지 않습니다.
“또 남한테 신세를 지는구나.”
“이 나이에 이런 병이라니, 이제 끝이겠지.”
B 씨의 가슴에는
오래된 죄책감과 두려움,
“나는 원래 좀 약한 사람”이라는 자기이미지가
두껍게 쌓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둘 다 같은 약을 먹고 있습니다.
같은 수술 부위를 꿰맸습니다.
하지만 그 약을 받아들이는 몸의 분위기,
그 꿰매진 자리를 바라보는 마음의 태도는
전혀 다른 색을 띠고 있습니다.
A 씨의 몸속에서
약은 “나를 도와주는 동료”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B 씨의 몸속에서
약은 “그래도 부족한 나를 간신히 붙들고 있는 마지막 줄”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생각의 차이가 아닙니다.
두려움과 불신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더 많이 분비하게 만들고,
그 호르몬은 다시
통증 민감도, 수면의 질, 면역 반응에 영향을 줍니다.
반대로,
조심스러운 희망과 신뢰의 감정은
신경계의 긴장을 조금씩 낮추고,
그 여유만큼 몸은
회복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쓸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회복이 빠르다는 말을
“의지가 강해서”라고만 축소해버리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이 모든 배경을
한꺼번에 지워버리는 셈이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복이 느린 사람에게
불필요한 죄책감까지 덧씌우게 됩니다.
이 장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확인해야 할 사실은
어쩌면 아주 단순합니다.
“당신이 느리게 회복되는 것은
당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당신 안의 지도가 다르기 때문일 수 있다.”
당신의 지도에는
어쩌면 이런 길들이 그려져 있을지 모릅니다.
오랫동안 누적된 과로와 긴장,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상실과 상처,
늘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굴어야 했던 습관,
“아프면 피해만 준다”는 오래된 믿음,
혼자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워 온 삶.
이 길들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당신의 몸과 마음이
이 길들을 따라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사실일 뿐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책이나 비교가 아니라,
지도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디에 낭떠러지가 있는지,
어디에 오래된 상처가 묻혀 있는지,
어디가 취약하고 어디가 의외로 튼튼한지 살펴보는 것.
그 이해가 시작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왜 나는 저 사람처럼 빨리 낫지 못할까?”
대신 이렇게 묻게 됩니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나는 어떤 방식으로 회복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당신을 비교의 감옥에서 꺼내어
자기 이해의 길 위에 올려놓습니다.
이제 다음 소단원에서 우리는,
회복의 속도와 방향을 좌우하는
보이지 않는 변수들을 하나씩 불러내 보려 합니다.
기대, 의미, 관계, 성격, 트라우마, 생활습관.
이 변수들이 어떻게 엮여
각자의 회복지도를 만들어 내는지 이해하게 된다면,
당신은 더 이상
“나는 왜 이 모양일까”라고 자신을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대신,
“아, 이러니 내가 힘들 수밖에 없었구나”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드러워진 눈빛이야말로,
당신 안의 치유 스위치에
첫 번째로 닿는 따뜻한 손길입니다.
어떤 사람은 폭풍이 지나간 뒤
금세 집을 다시 세우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폭풍을 겪고도
한동안, 무너진 잔해 사이에 멍하니 서서
손을 어디부터 움직여야 할지 몰라 서 있지요.
우리는 흔히 이 차이를
“근성”이나 “의지”라는 단어로 너무 쉽게 축소해 버립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회복에는 훨씬 더 섬세한 요소들이 얽혀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당신 안에도, 나만의 회복을 설계해 온
아주 정교한 숨은 프로필이 있습니다.
이제 그 프로필에 적힌 항목들을
하나씩 불러내 볼 시간입니다.
“이번 치료로… 조금은 나아지겠죠?”
병실에서 나지막이 건네는 이 한 마디 속에는
놀랍도록 많은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 속에서도
“그래도 한 번 해보자”라는 작은 불씨가 살아 있고,
또 어떤 사람의 목소리에는
“사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형식적으로 묻는 거예요”라는 포기가 묻어납니다.
몸은 이 미세한 차이를 모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대와 믿음은,
마치 콘서트의 지휘자처럼
몸 안의 여러 시스템에
“지금은 버틸 가치가 있다”는 신호를 보냅니다.
물론,
무작정 ‘잘 될 거야’라고 세뇌한다고 해서
모든 병이 순식간에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건 이 책이 말하고 싶은 세계가 아닙니다.
다만,
전면적인 절망과,
조심스러운 기대 사이에는
몸 안에 전혀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는 것,
완전한 믿음이 아니어도 괜찮지만
**“그래도, 어쩌면”**이라는 작은 여지가
이미 회복을 향한 문고리를 조금은 돌려 놓는다는 것을
기억해 두면 좋겠습니다.
당신 안의 기대는 지금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나요?
같은 병명을 듣고도
사람들은 전혀 다른 문장을 마음속에 씁니다.
“역시 나는 벌을 받고 있는 거야.”
“이제 내 인생은 끝났다.”
“이제라도 멈춰서라는 신호일지도 몰라.”
“살아 있는 동안, 더 나답게 살라는 기회일 수 있어.”
병은 사건이고,
의미는 해석입니다.
우리가 병을 어떤 단어로 부르는지에 따라
몸 안의 긴장과 태도는 크게 달라집니다.
‘벌’이라는 단어는
죄책감과 수치심을 불러오고,
‘끝’이라는 단어는
에너지의 수도꼭지를 단호하게 잠가 버립니다.
반대로,
‘신호’라는 단어는
조금 다른 길을 찾으려는 움직임을,
‘전환점’이라는 단어는
내 삶 전체를 다시 진열해 보는 시선을 불러옵니다.
당신의 안에는
아직 말로 꺼내지 않은 문장이 하나,
조용히 웅크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 병을, 내 인생에서 어떤 위치로 두고 있는가.”
이 질문을 하는 순간,
몸과 마음 사이에서 오가던
묵언의 해석이 처음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해석이 바뀌면,
하루하루를 견디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견디는 방식이 달라지면,
몸이 회복을 위해 쓸 수 있는 힘의 방향도 조금씩 틀어집니다.
병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조심스레 들어와 앉아
당신의 손을 한 번 잡고 가는 장면을 떠올려 봅니다.
그 손길 하나가
수술 부위를 꿰맨 실밥을 직접 고쳐 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밤의 통증은
조금 덜 날카롭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몸의 회복을 말할 때
우리는 너무 자주
‘나’라는 개인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회복은 늘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일어납니다.
걱정해 주는 사람,
단지 옆에 앉아 있어 주는 사람,
별 말 없이 밥을 챙겨주는 사람,
당신 대신 병원에 물어봐 주는 사람.
이 사람들은 모두
당신 안의 보이지 않는 의사에게
조용히 이렇게 말해 주는 존재들입니다.
“이 사람은 혼자가 아니야.
조금 더 힘을 내도 좋아.”
반대로,
오랫동안 혼자 견뎌야 했던 사람,
약해지면 버려질까 봐
끝까지 강한 척해야 했던 사람은
몸이 회복보다 방어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쓰곤 합니다.
낯설겠지만,
이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봐도 좋습니다.
“나는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지금 떠올릴 수 있는가?”
만약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실패한 삶을 살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더 고립 속에서 버텨왔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회복력의 지도를 다시 그리기 시작하는 첫 선이 그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금만 실수해도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잔인한 말을 퍼붓습니다.
“역시 너는 이것밖에 안 돼.”
“남들은 다 잘하는데 넌 왜 이 모양이냐.”
아무도 듣지 못하는 마음속 독백이지만,
몸은 이 말들을
고스란히 진짜 상사에게 듣는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혈압이 오르고,
어깨가 굳고,
위장이 조여 옵니다.
반대로,
실패하고 넘어졌을 때
자신에게 다정하게 말하는 연습이 된 사람들은
같은 고통을 겪어도
몸의 긴장이 조금 더 빨리 풀립니다.
성격은 타고난 기질과
자라온 환경이 섞여 만들어진 것이지만,
나를 대하는 어조는
지금 이 순간부터도 천천히 바꿔 갈 수 있는 영역입니다.
병을 겪는 동안
몸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목소리는
의사도, 가족도 아니라
사실 당신 자신의 목소리입니다.
지금 그 목소리는
몸을 꾸짖고 있나요,
아니면 겨우 버티고 있는 몸의 어깨를
조금이라도 토닥여 주고 있나요?
어떤 통증은
현재의 병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통증은
오래전의 기억과 연결된 문을
함께 열어젖히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병원에서
혼자 밤을 새우던 경험,
아무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던 순간들,
몸을 드러내는 것이
수치심과 연결되었던 기억들.
이런 기억들이 충분히 위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으면,
몸은 ‘위협’에 더 예민해지고,
작은 증상에도
생명의 위험으로 느끼며
과하게 반응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의사에게 설명을 들을 때
정보를 듣는 동시에
과거의 공포와도 싸우고 있습니다.
그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에
회복에 쓸 힘이
항상 조금 부족한 상태인 셈입니다.
이 상처들을
한 번에 고치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래, 내가 지금 이 병 앞에서
유난히 더 떨리고 무서운 데에는
이유가 있었구나.”
이 이해 하나가
몸을 옭죄던 보이지 않는 끈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 줍니다.
마지막 변수는
가장 단순해 보이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요소입니다.
몇 시에 자고,
어떻게 일어나고,
무엇을 먹고,
얼마나 움직이고,
얼마나 숨을 몰아쉬며 하루를 보내는지.
하루하루의 선택은
티 나지 않게 지나가지만,
몸 입장에서는
매일 한 줄씩 쓰이는 일기와 같습니다.
“오늘도 늦게 잤다.”
“오늘도 숨을 끝까지 참아가며 일을 했다.”
“오늘도 점심을 허겁지겁 넘겼다.”
이 문장들이 오랫동안 반복되면,
어느 순간 몸은
“이 리듬으로는 더 이상 못 버티겠다”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 말이 때로는 질병이라는 방식으로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물론,
이미 아픈 몸으로 살면서
완벽한 생활 습관을 갖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
단 10분의 수면,
단 한 숟가락의 여유,
단 한 번의 깊은 숨이라도
“이제부터는 너도 좀 쉬어도 괜찮아”라는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생활 리듬은
거대한 개혁이 아니라
아주 작은 선택의 누적에서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봅니다.
같은 병실, 같은 수술, 같은 진단.
그러나 서로 다른 속도로 회복하는 사람들.
우리는 이제 압니다.
그 차이는 결코
“누가 더 강한가, 누가 더 약한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기대와 믿음의 정도,
병을 해석하는 문장,
곁에 있는 사람들,
나 자신을 대하는 어조,
오래된 상처의 깊이,
생활 리듬과 작은 선택들.
이 모든 것이 겹겹이 포개져
당신만의 회복지도, 당신만의 회복 프로필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니 누군가의 빠른 회복 앞에서
부러운 마음이 들 수는 있지만,
스스로를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그 사람과
전혀 다른 지도 위를 걸어왔고,
지금도 전혀 다른 풍경 속에서
회복을 시도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 다음 장에서 우리는
이 변수들을 실제로 점검해 보며
당신의 회복지도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그려볼 것입니다.
그 지도 위에서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나는 왜 이 정도밖에 못 낫지?”가 아니라,
“이 지도에서, 지금 여기서,
나는 어디부터 조금씩 돌봐 줄 수 있을까?”
이 질문이 바뀌는 순간,
당신 안의 치유 스위치는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또 한 번 ‘딸깍’ 소리를 내며 움직입니다.
밤에 혼자 누워 있으면
이상하게 다른 사람의 속도가 먼저 떠오릅니다.
“저 사람은 벌써 퇴원이래.”
“저 사람은 항암도 잘 버틴다는데…”
그리고 그 다음에
어김없이 따라오는 문장이 있습니다.
“나는 왜 이 정도밖에 안 될까.”
이 말은 겉으로는 질문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미 대답을 정해 놓은 판결문에 가깝습니다.
“역시 나는 모자란 사람이다.”
이 한 문장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오래
당신의 가슴 안을 오가며
몸을 더 움츠러들게 했을까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시험, 같은 시간, 같은 문제”를 풀어 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른이 되어서도
늘 같은 기준을 들이댑니다.
같은 병,
같은 수술,
같은 약,
그러니 회복도 같아야 정상이라고 믿어 버립니다.
하지만 1-1과 1-2에서 보았듯이,
몸과 마음은 결코 그런 시험지를 받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튼튼한 가족의 품에서 자라
아프면 돌봐주는 사람이 당연히 있었고,
누군가는
어릴 때부터 아픈 티를 내면
“유난 떤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누군가는
실패와 재난 속에서도
“그래도 우리는 함께야”라는 문장을 배웠고,
누군가는
버티지 않으면 버려지는 집에서
“힘든 티를 내지 말 것, 울지 말 것”을 배웠습니다.
이 서로 다른 역사를
수술 날짜 하나로,
진단명 하나로
‘같은 출발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도 불공평한 일입니다.
그러니
“왜 나는 저 사람만큼 못 나을까”라는 질문은
처음부터 틀어진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묻는다면,
나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못 낫는 사람이 아니라,
너무 험한 길을 오래 걸어온 사람일 뿐일지도 모른다”고.
이제부터 우리는
타인과의 비교 대신
“나”라는 사람의 지도를 그려 보는 일을 해보려 합니다.
대단한 작심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조용한 시간에
종이 한 장, 펜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가능하다면
이 글을 읽다가
잠시 멈춰도 좋습니다.
당신의 회복지도를
실제로 손으로 그려 보는 것이
이 소단원의 목적이니까요.
종이 위에
동그란 원을 하나 그려 놓고,
그 원 바깥에
이렇게 여섯 개의 단어를 써 봅니다.
기대 / 의미 / 관계 / 나를 대하는 말 / 오래된 상처 / 생활 리듬
그리고 스스로에게
아주 솔직하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봅니다.
첫째, 기대
“나는 지금,
이 병과 회복에 대해
마음 깊은 곳에서
어느 정도를 기대하고 있을까?”
- 솔직히 거의 기대하지 않는다
- 조금은 나아질 수도 있다고 믿는다
- 많이는 아니어도, 분명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느낀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쪽에 가까운지
작게 표시를 해봅니다.
둘째, 의미
“나는 이 병을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가?”
벌, 징벌, 실패, 끝, 우연, 신호, 전환점,
혹은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무언가.
머뭇거리더라도 좋으니,
당신 마음이 가장 자주 떠올리는 단어를
한 번 적어봅니다.
셋째, 관계
“지금의 나에게
‘정말로 괜찮아?’라고 물어봐 줄 사람은
몇 명이나 떠오르는가?”
한 명,
혹은 아무도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없다”라고 적었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고백이 아니라
당신이 얼마나 혼자 버텨 왔는지를 보여주는
귀한 증거입니다.
넷째, 나를 대하는 말
“힘들 때,
나는 속으로 나 자신에게
어떤 말을 가장 자주 건네는가?”
“역시 넌 이것도 못 버텨.”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잘했다.”
“이게 다 네 탓이야.”
“그래도 오늘 하루를 버텼구나.”
그중에서
당신 안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문장을
그대로 적어봅니다.
다섯째, 오래된 상처
“이 병 앞에서
유난히 더 두렵거나 서러운 이유가
혹시 과거 어딘가에 있지는 않을까?”
떠오르는 일이 있다면,
그 장면을 자세히 쓰지 않아도 좋으니
“초등학교 때 입원”
“엄마가 곁에 없던 밤”
“누구에게도 말 못한 사건”
같은 짧은 표식이라도 남겨 봅니다.
여섯째, 생활 리듬
“지난 석 달 동안의
나의 잠, 식사, 움직임, 휴식의 리듬은
내 몸 편에서 볼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숨 좀 돌리자”라고 말할지,
“나는 진작부터 무리였어”라고 말할지.
솔직한 느낌을 한 줄로 적습니다.
이 질문들에 답하는 동안
혹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면,
그것은 잘못하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라
드디어 나 자신을 제대로 보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자세히 물어봐 주지 않았던 것들을
당신이 처음으로
당신에게 물어봐 주고 있으니까요.
이제 종이 위의 동그란 원 가운데에
작게 이렇게 적어 봅니다.
“나의 회복지도”
그리고 아까 적었던 여섯 가지 항목마다
0에서 10까지
대략적인 점수를 매겨 봅니다.
기대: 3
의미(희망 쪽 해석): 2
관계 지지: 1
나를 대하는 다정한 말: 2
오래된 상처가 여전히 날카롭게 아픈 정도: 9 (숫자가 높을수록 아직 힘든 상태)
생활 리듬 안정감: 4
예를 들어
이렇게 적혔다고 상상해 봅시다.
이 숫자들은
어떤 시험의 점수가 아닙니다.
누가 더 높고 낮고를 경쟁하는 랭킹도 아닙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서 있는 지형을
조금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지도일 뿐입니다.
다른 누군가는
관계 지지가 8일 수 있고,
대신 자신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8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누군가는
기대와 의미는 높지만
생활 리듬이 2에 가깝고,
몸이 이미 너무 지쳐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지도는 말해 줍니다.
“그래서 네가 힘들었구나.”
“그래서 네 몸이,
이 정도 속도로밖에 못 걸어왔구나.”
이 깨달음이 찾아오는 순간,
눈물이 찔끔 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당신은
이 모든 변수들을 보지도 못한 채
오로지 ‘의지’라는 잣대로만
자신을 때려 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나 어려운 지형을 지나오면서도
나는 그래도 여기까지 온 사람이구나.”
이 문장을
마음속에서 한 번
조용히 읊어 보십시오.
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당신 안의 어떤 부분은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래, 드디어 나를 좀 알아봐 주는구나.”
이제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지도를 부러워하며
“나도 저기 있었어야 하는데”라고
계속해서 괴로워할 것인지,
아니면
지금 이곳,
당신의 지도 위에
작게라도 ‘출발점’ 표시를 새겨 넣을 것인지.
이 책의 나머지 장들은
당신의 회복지도에서
수치가 낮은 곳을 조금씩 채워 나가는
작은 방법들을 제안하게 될 것입니다.
기대가 낮다면,
억지 긍정이 아니라
작은 변화의 경험을 쌓아
“아, 나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구나”를
몸으로 느끼게 돕는 연습들.
병의 의미가 ‘벌’에 가깝다면,
그 해석을 천천히 풀어
“그래도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건 무엇일까?”를
함께 찾는 문장들.
관계의 점수와
나를 대하는 말의 점수가 낮다면,
도움을 요청하는 연습과
나에게 다정하게 말하는 연습을
아주 소심하게, 그러나 꾸준히 해나가는 방법들.
오래된 상처의 숫자가 높다면,
그 상처를 한꺼번에 꺼내지 않고도
조금씩 안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
소마틱한(몸 중심의) 접근들.
생활 리듬이 무너져 있다면,
한 번에 완벽한 루틴이 아니라
하루에 5분, 10분
몸에게 “지금은 쉬어도 괜찮아”라고 알려주는
작은 의식을 만드는 법.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처럼 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의 나를
조금 덜 다치게 돌보는 기술”**입니다.
이 장의 끝에서
우리가 함께 나누고 싶은 문장은
어쩌면 아주 단순합니다.
“당신은 느린 사람이 아니라,
당신의 역사만큼의 속도로
걷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속도를 억지로 끌어올리는 채찍이 아니라,
당신이 지치지 않고 걸어갈 수 있도록
옆에서 같이 맞춰 걷는 동행이 되고자 합니다.
지금 들이마신 숨을
한 번 더 천천히 내쉬어 보세요.
당신이 오늘 이 종이 위에
당신의 회복지도를 그려준 것만으로도,
당신 안의 치유 스위치는
분명히 한 번,
따뜻한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여기까지 읽어 오며
우리는 이런 사실을 조금씩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회복 속도는 의지 한 줄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
각자에게는 서로 다른 보이지 않는 변수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변수들은,
우리가 아픈 몸을 바라보는 방식에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렇다면,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묶으면
어떤 문장이 될까요?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이 장이 말하고 싶었던 결론은 결국 이것입니다.
“몸과 마음은 원래 같은 팀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몸을 자꾸 ‘보고서 내는 직원’처럼 대해왔습니다.
수치가 기준치보다 올라가면
“왜 이래?”라고 화를 내고,
통증이 생기면
“조용히 좀 해!”라고 약으로 눌러버리고,
피곤하다고 신호를 보내면
카페인으로 입을 막곤 했습니다.
몸은 수년, 수십 년 동안
여러 방식으로 말을 걸어 왔습니다.
“여기 좀 풀어줘.”
“이 속도로는 버티기 힘들어.”
“나도 좀 쉬고 싶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언어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몸은
마지막 수단으로,
‘병’이라는 거친 언어를 꺼내 들었습니다.
이 장이 한 일은
바로 그 언어를
조금 더 조용한 말들로 번역해 보는 작업이었습니다.
“나는 게으르고 약해서 안 낫는 사람”
이 아니었다는 것.
“내 몸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있는 힘껏 버텨 온 존재”
였다는 것.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몸은 더 이상
고장 난 기계가 아니라
지친 동료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같은 팀인데,
우리는 너무 오래 서로를 오해해 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기대, 의미, 관계, 상처, 생활 리듬은
모두 **‘마음이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하루에도 수없이
세상과 나 자신, 그리고 병을 해석합니다.
“이건 끝장이야.”
“그래도 한번 더 해볼 수 있을지 몰라.”
“나는 혼자야.”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은 있어.”
이 해석은
스트레스–면역–뇌–호르몬으로 이어지는
몸 안의 거대한 시스템에
조용히 지시를 내립니다.
몸은 지휘자에게 반항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비상사태야”라고 판단하면
몸은 긴장을 높이고,
모든 것을 방어 모드로 돌립니다.
마음이 “여기는 조금 안전한 곳이야”라고 느끼면
몸은 방어 태세를 약간 풀고,
회복과 재생 쪽으로 에너지를 돌리기 시작합니다.
이 장이 강조한 보이지 않는 변수들은
결국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
몸의 회복 모드와 방어 모드를 조절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음이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아무리 “나는 괜찮다”고 외쳐도
심각한 병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이 “나는 끝났다”고 단정하는 순간
몸은 그 말에 맞추어
회복을 포기하는 듯한 방향으로 기울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정신의 힘은
기적을 강요하는 힘이 아니라,
몸이 이미 하고 있는 회복 작업을
방해하지 않고, 조금 더 돕는 힘입니다.
마음은 지휘자,
몸은 오케스트라.
음악이 완벽해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최소한
지휘자가 계속 무대 뒤에서
“망했어, 이 곡은 끝났어”라고만 외치고 있지는 않도록
연습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배워갈
새로운 회복의 공식입니다.
1장은 사실,
“몸과 마음은 원래 하나였다”는
1부 전체의 제목을
조용히 풀어쓴 길고 긴 서문입니다.
우리가 여태까지 빼먹고 있던 건
근성이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다만,
내 몸과 마음이 어떤 지형을 지나왔는지
제대로 바라볼 시간이 없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 장은
당신에게 몇 가지를 선물하고
다음 장으로 당신을 보내고자 합니다.
“왜 나는 남들보다 느릴까?”라는
오래된 질문 대신,
“나는 어떤 역사와 지도 위에서
지금의 속도로 회복하고 있을까?”
라는 새로운 질문을 건넵니다.
남과의 비교 대신,
나만의 회복지도를 손에 쥐도록 합니다.
그 지도에는
당신이 견뎌 온 외로움도,
당신이 겨우 붙잡고 온 희망도,
당신만의 생존 방식도
조용히 표시되어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해 주고 싶어 합니다.
“당신 안의 보이지 않는 의사는
이미 수년, 수십 년 동안
최선을 다해 당신을 살려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의사와 같은 편이 되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려 합니다.
2장부터 우리는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스트레스–면역–뇌–호르몬이
어떻게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고리에
마음이 어떤 식으로 손을 얹을 수 있는지
조금 더 과학의 언어로 들여다볼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미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이 1장에서,
당신이 조용히
자기 자신의 지도를 인정해 준 바로 그 순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
이 말을 마지막으로
1장을 닫고 싶습니다.
“당신은 고장 난 몸을 가진 실패자가 아니라,
너무 힘든 길을 통과해 온
여전히 진행 중인 회복의 존재입니다.”
이제,
그 사실을 믿어 보기로 한 사람만이
넘어갈 수 있는 다음 페이지로
우리 함께 조금 더 걸어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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