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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희 May 15. 2021

환갑에 처음 써보는 수필

처음으로 써보는자기소개서

요즘은 입시부터 취직까지 일반화되어 있는 자기소개서를 나는 한 번도 써보지 못했다. 고교까지 뺑뺑이 세대로 대입은 특차 전형이라는 제도가 막 도입되기는 했지만 역시 필기시험 성적으로 평가하는 것이었고, 직업의 진입도 국가고시를 통한 자격의 취득이어서 자기소개서를 쓸 기회가 없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세상의 기준으로는 단 세줄 안에 정리될 수 있겠다. 1961. 생 여자, 서울법대 81학번, 1989.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21기, 1992. 변호사 개업, 이혼 민사 파산업무, 카이스트 노스웨스턴 LLM 과정 수료, KBS 뉴스 자문변호인단 변호사...


차분히 생각해 본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린 시절 외로움을 일찍 알았고 혼자 무언가를 열심히 했다. 주로 그림 그리기, 만들기였는데 종이 인형을 그리고 오리기를 해서 상자에 3천 개를 모아 놓았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수업 중 휴식시간에 친구들이 부탁한 인형을 그려주느라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다. 


집에서는 플라스틱 인형 옷을 만드느라 집안 곳곳에 있는 천 조각을 찾아 돌아다녔다. 걸레로 쓰려고 둔 헌 옷들을 오려서 인형 옷을 만들고 그 자투리들을 바닥에 널려 두어 친할머니가 "계집애가 여우밥을 만든다"며 타박했던 기억도 있다. 

이때 닦은 실력은 여고 시절 가사 실습에서 발휘되어 내 작품이 항상 견본으로 채택되곤 했고 지금도 인생에서 견디기 힘든 순간이 오면 옷을 만들든 뜨개질을 하든 나만의 피난처가 된다. 


그리고 좀 생뚱맞지만 나는 끼가 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내가 차분하다 못해 차갑다고 한다. 

내가 4, 5살 무렵 엄마의 사촌 남동생( 삼촌이라고 불렀다)이 약 6개월간 나와 남동생을 돌봐주기 위해 우리 집에 함께 있었다. 이제 막 20대가 된 삼촌이 어린아이 둘을 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지금 생각하면 십분 이해하지만, 내가 기억하기로 우리(나와 남동생)는 엄마가 출근하는 순간부터 퇴근해 돌아올 때까지 방안에 감금되어 있는 학대를 받았다. 


어느 순간 삼촌이 자는 것 같고 마침 문이 열려 있는 빈 틈을 노려 동생을 데리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옛날 식 한옥 대문의 삐그덕 소리에 뛰어나온 삼촌 손에 잡혀 대롱대롱 매달려 방 안에 다시 감금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이렇게 감금되어 있는 동안 장난감도 없는 상태( 그 시절 시골에 장난감 가게도 없었을 것이고 있다 해도 치열하게 돈을 모아야 했던 가난한 교사가 장난감을 사 줄 수도 없었을 것이다)에서 유일하게 들리는 건 삼촌이 틀어 놓은 라디오 소리였다. 요즘 다시 유행하는 트로트가 그 시절 라디오에 유행가로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고 난 말하자면 조기 음악교육을 받은 셈이다. 유행가를 모두 외웠고 따라 불렀다. 


어느 날 엄마 앞에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불렀는데 칭찬은커녕 애들은 그런 노래 부르면 안 된다고 야단을 맞았다. 그 이후 어른들 앞에서 부르지 않았지만 초등학교 2학년 집에 티브이가 생긴 이후 티브이 쇼프로는 모두 섭렵해서 졸업할 무렵에는 가사를 외우고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수백 곡에 이르렀다. 뺑뺑이로 기독교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아침저녁 간이 예배 시간에 부르는 찬송가로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2007. 성악을 배울 기회가 있어 개인 레슨을 한동안 받았다. 선생님으로부터 지적 사항을 바로 알아듣고 바꾸는 순발력 외에도 음악을 이해하는 음악적 끼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마도 조기교육과 지속된 접촉이 낳은 결과라고 생각된다. 아마추어 동호회 음악회 무대에 3회 드레스 입고 덜덜 떨면서 공연도 했다. 


지금은 성악 모임도 나가지 않고 노래 연습도 하지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성악을 더 잘하려고. 호흡을 늘리기 위해 시작한 요가는 13년째 열심히 하고 있다. 요가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많고 삶이 다 할 때까지 요가 관련 경험을 하게 될 것 같다. 


학문으로는 심리학, 철학에 관심이 많다. 변호사 업무 초기에는 누구나 그렇지만 사건 수임이 어렵다. 당시 개업한 여자 변호사가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소수였기에 여자 변호사를 찾아온 여자 의뢰인들의 이혼 사건이 수임할 수 있는 사건의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들을 보듬고 버팀목이 되기에는 너무 어렸다. 이혼 사건은 법률적 문제의 비중보다는 심리적인 문제의 비중이 훨씬 높다. 


의뢰인들은 변호사보다는 정신과 의사가 더 필요한 듯했다. 업무상 필요에 의해 심리학 관련 책을 보게 되었고 이것이 철학 책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누군가의 아픔을 듣고 해결해 주는 일이 직업적 소명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내 삶의 의미이기도 하다. 작게는 나와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근심거리가 되지 않기, 그들에게 위안이 되기 크게는 평온한 삶을 사는 방법을 찾아서 함께 하기 등이 나의 바람이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청춘"이라는 진부한 말대로 나는 아직도 학생인 것 같다. 책을 읽다가도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마음 급하게 뒷페이지를 떠들어 보며 나를 채근한다. 몇 년 전 손자와 손녀를 보았고 길에서 늙수그레한 아저씨로부터 "어르신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는 말까지 들은 엄연한 할머니다. 청춘인 마음과 노년의 몸 사이에서 어떤 삶이 펼쳐질지 열심히 구경해 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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