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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희 May 17. 2021

은퇴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일이 뭔가 시작도 안 한 것 같은데 끝내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밥도 이제 먹기 시작했는데 그만 먹으라고 하면 섭섭한 것처럼... 


내게는 내 직업이 그렇다. 사법고시를 여러 번 떨어진 거야 내 능력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결혼 후 출산을 하고 사법연수원에 들어가면서는 뭘 제대로 해 볼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 된 것이다. 아이를 맡기고 연수원을 다닐 수 있게 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친정 엄마는 초등학교 교사 직업 외에도 뜬금없이 세를 받던 목욕탕 영업을 직접 하겠다고 나섰고, 약간의 방황 끝에 판사가 된 남편은 무슨 놈의 부 회식이 그렇게 많은지 매일 술이 취해 새벽 귀가를 개근하고...

그래서 가족 중 나와 가장 성격이 비슷한 착한 친정아버지는 새벽이면 사는 건물 지하 목욕탕 기관실에 내려가 불을 때는 일을, 나는 목욕탕 카운터를 지키는 일을 해야 했다. 아이를 돌봐 주는 친정 이모가 출근하는 9시가 되면 친정 이모에게 카운터를 맡기고 나는 아이와 함께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아이와 낮동안 이별하는 세리모니를 해야 했다. 내가 어린 시절 엄마와 아침마다 이별할 때 겪었던 상처를 아이가 겪지 않게 하려고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함께 하기로 한 것인데 이 행사까지 하고 연수원에 출근하면  그야말로 파김치가 다 되어서 수업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이렇게 투잡, 쓰리 잡 뛰는 심정으로 연수원을 수료한 후에는 임용되는 여자 판사 숫자가 지나치게 많아서 3명은 떨어뜨려야 한다는 황당한 이유로 그 세 명 중 하나에 끼어 임용 탈락을 당했다. 예상하지 못한 탈락이어서 변호사 취업 시장에 끼어 들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겨우 법대 산악반 선배 변호사 사무실 방 하나를 빌려 개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제대로  된 수련도 받지 못하고 얼껼에 변호사가 되었다.  


내 장점이자 단점은 항상 주제 파악을 잘한다는 것이다. 일반인들은 변호사는 다 같은 변호사일 것으로 생각하지만 변호사는 다 같은 변호사가 아니다. 대법관, 고등부장 판사, 지방부장 판사, 평판사 출신이 있고  검찰 출신도 고관부터 평검사 출신까지 다양하다.  나와 같이 연수원만 나온 변호사는 학교로 비교하면 정규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검정고시를 한 것과 같다. 법원과 검찰에서는 본인이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사건을 맡아 처리하면서 실무를 익히고 법률 지식이 쌓인다. 이 트랙에 오르지 못한 경우에는 선배 변호사 사무실에 월급 받는 변호사로 취업하여 사건 처리를 하면서 실무를 익히게 된다. 이 과정조차 겪지 못한 나와 같은 변호사들은 독학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건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이다. 법률 실무에 관한 교과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건이 오기를 기다려서 선배들에게 물어가며 사건 처리를 해야 했다.  당시 나는 내 처지를 냉정하게 이해했고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모든 비용을 최소화했는데 이때부터 절약은 내 인생 전반을 지배했고 이제는 딸로부터 "쫄보"라는 푸념을 수시로 듣고 있다. 


변호사는 네트워크가 중요한 자영업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데 나는 저녁 6시 이후 어떤 약속도 잡은 일이 없다. 아이들 옆을 지키겠다는 나와의 약속이었는데, 이는 모든 사회적 네트워크가 저녁에 이루어지는 현실에서 사회생활을 포기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 결과 사무실 유지가 항상 고민일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내 직업에 충실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때가 되어갈 즈음 암 진단을 받았고 이제는 번듯한 변호사가 되겠다는 건 그야말로 사치스러운 꿈이 되고 말았다. 


식당에 손님이 없으면 식당으로 존재할 수 없다. 변호사도 의뢰인이 없으면 사실상 휴업이다. 의사도 마찬가지... 자영업의 현실은 냉혹하다. 몇 년 전  아이가 아파서 동네 내과에 간 일이 있다. 거기서 벌어진 장면이다. 약 70세쯤 된 아저씨가 들어와 간호사에게 접수를 하고 간호사는 " 팔을 걷으시고 주사를 맞으실게요"라고 했다. 흔히 보는 서비스 직종에서 듣는 친절한 말투였다. 그런데 그 아저씨가 "내가 주사를 맞는데 왜 간호사가 맞으실게요라는 말을 해, 이건 어느 나라 말이야?"라고 하면서 화를 냈다.   우리 순서가 되어 아이가 의사의 진찰을 받았는데 70대 후반의 의사는 아이가 "편도 결석"으로 괴롭다고 하자 그런 병명은 없다면서 아이의 고통을 무시했다. 물론 아이는 집에 와서 다시는 그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나를 원망했고... 내가 수십 년간 다닌 단골 내과병원이었다. 의사와 함께 같이 늙어간 환자들이 젊은 간호사와 소통하지 못하고 젊은 환자는 늙은 의사를 거부하고... 이렇게 세월이 흐르면 전문직 조차 세대차를 극복하기 힘들어 자연적으로 은퇴에 이르게 되는 것 같다. 


박경리의 토지를 읽으면서 그녀의 탁월한 능력에 감탄했다. 김수현의 드라마를 보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도 그럴까?  박경리가 지금 소설을 쓴다면 어떨까? 그녀가 이해하는 시간과 장소, 소통 수단이 시골 장터, 동네 다방 그리고 편지, 유선 전화 등 지금의 그것과 다 다른데 어떻게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까?  자연스럽게 세대는 교체되고 은퇴는 부지불식간에 현실이 된다.  "이번 생은 망했다(이생망)"을 외치는 젊은 이들이 많은 현실에서 내가 은퇴를 억울하고 섭섭하다고 하는 건 배부른 투정이 될 것이지만 내 마음이 그런 건 나도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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