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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희 May 19. 2021

설악산 자락에서

내가 대학에 입학한 1981년은 본고사가 폐지되고 졸업정원제가 시작된 첫 해였다. 입학정원이 전년 대비 3배로 증가했다. 그 덕분인지 나는 재수 끝에 서울 법대에 합격했다. 3월의 캠퍼스는 어디나 붐볐고 줄을 서야 했다. 갑자기 늘어난 정원을 시설 확충이 따르지 못했다. 


3월과 4월은 신입생인 내게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나를 생각하게 했지만 나는 어떤 선택을 하기에는 아무 정보도 없었고 그저 몸으로 부딪쳐 깨달아 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세대들이 들으면 웃겠지만, 1980년대에는 " 여자가 왜 법대에 왔느냐?"는 질문을 대입 면접 교수부터 함께 입학한 남자 동기생들까지 줄곳 던지던 시절이었다. 굳이 대답하려면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그럴듯한 답을 해 줄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저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그 상황을 넘겼다. 


금녀의 영역을 뚫었던 여자 선배가 한 학년에 1명 내지 2,3명 밖에 없던 시절이어서 법대 여학생은 좋은 구경거리였다. 7명이었던 여자 동기들이 2명씩 짝을 지어 각 반에 배정되었고 나만 혼자 반 배정을 받았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나중에 형법 교수님이 시험 감독에 들어와 내게 말씀해 주셨다. 반 편성을 할 때 소수의 여학생들의 고충을 고려해 혼자 떨어뜨려 놓지 않는 원칙을 세웠는데 여학생이 일곱이라 들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6명밖에 없었다고 했다. 재수 시절 쇼트커트를 한 적이 있고 이때 대입 전형서에 붙일 증명사진을 찍어서 벌어진 일이다. 내가 보기에도 사진으로는 도저히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 교수님은 주민번호 첫자리"2"를 찾아 나를 찾을 만큼 성의는 없었던 것 같다. 


하여튼 60명이 넘는 남학생들 틈에 혼자 끼어 앉아 수업에 참여하면서 지금도 사회성이 빵 점인 내가 겪어야 했던 황당한 일들을 떠올리면 나는 지금도 혼자 피식거리며 웃는다. 1학년 교양수업은 다른 과 학생들과 함께 하는 수업도 있었지만 주로 우리 과 반 별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반 동기생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했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고 이마에 인생 성공자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다니는 듯했던 오만한 남학생들은 나를 마치 동물원 원숭이 보듯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돌이켜 보면 오직 공부에만 전념했을 모범생들이 반에 한 명뿐인 여학생에게 말을 붙이기는 어려웠을 텐데, 불편한 관심의 대상인 나는 하루하루가 고역이어서 그 시절 동기생들에 대해 따뜻한 기억이 없다. 


몇 개의 동아리를 기웃거린 끝에 서예반에 들어갔으나 신문지에 줄 긋기만 하는 3일의 명상 끝에 뛰쳐나왔다. 가장 기초적인 과정인 줄 긋기를 반복하기에는 내 인내심이 부족했고 무엇보다 나는 함께 말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법대 산악반에 입회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친구 따라 강남 간 케이스다. 이름을 가나다 순으로 배정하여 학번을 부여받았던 것 같은데 내 이름 앞 두 명과 출석 호명 때문에 겨우 말을 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어느 날 그 두 명의 동기생들이 내게 법대 산악반에 갈 건데 같이 가보자고 했다. 운동을 싫어해서 체육 점수도 최 하위였던 내가 이들을 따라 산악반에 들어간 건 그나마 겨우 학교에서 대화를 할 만한 상대가 생겼는데 더 이상 고립되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등산이라면 하이킹 정도밖에 몰랐던 무식함 때문이었다. 막상 들어가 보니 법대 산악반은 하이킹이 아니라 바위 타기를 주로 하는 전문가 급의 산악 동아리였다. 역사도 30년이나 된...


선배들이 추천한 남대문 시장 등산용품점 등산화를 사 신고 따라나선 인수봉 등반은 나 때문에 지체되어 새벽 2시에 겨우 하산할 수 있었다. 함께 한 선배와 동기들에 대한 미안함, 수치심, 과연 암벽 등반을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한 동안 지속되었다. 이렇게 법대에서 고립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시작한 산악반 활동은 동아리에서 만난 동기생과의 결혼으로 이어졌고 지금까지 OB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다.  이제는 역사가 60년도 넘어 수백 명의 회원이 있고 매월 함께 산행을 하고 설악산 자락에 동아리 산장도 마련하여 텃밭에 감자 등 야채도 함께 키우고 있다. 


40년을 보아 온 선배들의 모습이 초로기의 내 모습과 겹쳐진다. 산행 중 체력이 부족해서 뒤쳐지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수월해진 건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이제는 노년기에 이른 선배들의 느린 발걸음 때문인 것 같다. 


지나고 보니 내가 인생에서 제일 잘한 것 중 하나가 법대 산악반에 들어간 일인 듯하다. 특히 4,5월의 산은 꽃과 새 잎들의 향연이다. 십 수년 전 병에 걸려 우울한 상태에서 매일 홀로 우면산을 다닌 적이 있다. 산에서 작은 풀잎들을 보면서 이렇게 작은 풀도 생명이 있어 살고 있는데 내가 죽는다면 이 미물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더 우울했었다. 그런데 한 달 후에는 그래 죽어서 먼지가 되어도 이 우주 안에 이 예쁜 풀잎과 함께 존재하는 거라는 깨달음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내 눈에 보이는 풀 한 포기 나무 꽃들이 모두 나를 받아주는 친구들로 느껴졌다. 진정으로 산행을 즐기기 시작했다. 동아리 초기에는 사람들과의 교류가 관심사였다면 지금은 산, 자연이 내게 주는 기쁨이 더 큰 것 같다. 40년을 함께 한 산 사람들,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맞아주는 산이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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