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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와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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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심리스 Jun 14. 2021

아기와 엘리베이터

나와 아기 (1)

돌쟁이 아기와 함께 산다는 것은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여러 것들과 만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 똑같이 만나고 느끼고 살았던 일상인데 아이와 함께 하며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새롭게 겪게 된다.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숭고한 생명의 신비이며 엄마로서의 경이로운 체험 ... 이런 류의 것들은 확실히 아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도 부분적으로 있긴하나 매우 감성적이면서도 교양은 그리 높지 않은(?) 나에게는 일상을 살아가며 숭고한 생명의 신비를 느낄 때는 거의 없다... (음. 왠지 창피하니까 그냥 아주 찰나의 순간에 잠시 느낀다고 하자.)


오히려 내가 놀라운 것은 그런 숭고한 것들이 아닌 정말 작지만 매일매일 일어나는 변화들이다.

아기와 함께 밖을 나가면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새로움이 펼쳐진다.

문을 나서자마자, 베이터를 타는 순간부터 말이다.


베이터에서 우리는 타인과 만나게 된다. 무표정하게 내려가거나 올라가야할 층수를 누르고 

언제 도착하지 언제 문이 열리지, 왜 안닫히지. 등등의 생각을 하며 애써 눈을 안 마주치려고 노력한다.

타인에게는 관심을  보이는 것이 베이터 안의 국룰인 것을!

아기가 생기기  아가씨 시절(아가씨라는 말이 낯설다?), 아니 처녀 시절(이건  이상하다!), 아니 홑몸이었던 시절(???), 혼자( 말이 그나마 적절한 .) 내가 탔던 베이터는 차가운 공기의 네모난 공간.

네모진 공간 만큼이나 각지고 차가운 그런 공간이었다.

내가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누군가 불쑥 내게 관심을  주는 것도 불편한 그런 공간.  

그런데 아기와 함께 내가 타게 되는 베이터는 기존에 느꼈던 인식을 송두리째 바꾸는 소통의 공간이다.

네모지기 보다는 둥글둥글 동그란 느낌이다. 타인들이 불쑥불쑥, 그것도 자주 대화를 건다. 아기를 매개로 소통이 오간다.  각자의 인간들이 가진 경계선들이 쉽게 무너진다고나 할까

아이스브레이킹의 순간이 아주아주 빠른 속도로 불쑥불쑥 쉽게 일어난다고나 할까


모르는 아주머니가 탄다.

아기가 아주머니를 바라보고 (혹여 바라보고있지 않아도)

‘아기야 안녕~~’ (아기는 말을 못한다.) 

이때부터 아주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연출된다.

‘안녕하세요 ~’(이것은 나의 목소리다 ㅜㅜ)

‘어디가니 아가야~~’ (역시 아기는 말을 못하므로)

‘저는 마트가요 아줌마~’ (역시 이것도 나의 목소리다. 최대한 작은소리로 너무 귀엽지는 않은척을 하면서 웃으며 친절하게~가 포인트다.)


이런 식으로 모르는 아주머니와 - 나와 - 아기는 대화를 한다.

아기는 대화를 하지 못했으므로 .. 나와 아주머니가 대화한 것이겠지...


이런 룰 사이에서 새로 이사를 오며 겪게 된 이야기

초등학교 4학년 정도의 아이가  나와 우리 아기와 함께 베이터를 탔다.

쭈뼛쭈뼛하는데 민망스러울 정도로 우리 아기가 초등학교 언니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다.

내가 아기에게 이야기했다.

“으이구~ 쳐다보기만 하면 어떡해, 인사를 해야지~ 안녕하세요 하고”


그 다음 상황이 내 예상과는 너무 다르게 흘러갔다.

나의 예상은 아기가 자기를 좋아하는구나 하며 아기를 쳐다보는 초등학교 언니의 훈훈한 모습정도였는데

갑자기 그 초등학교 언니가 내게 너무 놀라며 꾸벅 인사를 하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우리 아기에게 했던 그 말을 자기에게 한 것으로 생각했나보다.

어른을 봤으면 인사를 해야하는 거라고 알고는 있으나 베이터에서 그런 훈계가 가당키나  말인가...

스스로 꼰대가 아니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 졸지에 암묵적 대화가 잘못 오가며 나는 아이에게 인사나 잘하러 다니라고 훈계하는 아줌마가 되고 만 것이다.

얼굴이 화끈해졌다. 무튼 그 이후로 같은 동에 사는 그 아이는 나와 두어번  더 마주쳤다.

그 때도 왠지 어른들에게 열심히 인사를 하는 모습...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봐도 어른이면 인사를 열심히 하는 것 같아  괜시리 마음이 미안해지고 귀가 화끈거리기도 한다. 인사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어린아이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어른이 되고싶지는 않았는데

아기 - 어른 -대화의 룰이 익숙지 않은 나에게 이는 새롭고 조금은 창피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암묵적 룰을 잘 이해하지 못할 수 있는 아이에게는 절대

아기 연기를 펼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ㅋ(비장)


오늘도 백화점 문화센터에 갔다.

오늘도 베이터를 여러번 탔고  때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한마디씩 이야기를 나누었다.

‘코로나 때문에 답답하지 ~’

‘너무 귀엽다.’ ‘똘망똘망하네.’

‘왜 마스크를 안썼니~’ 이 말에는 억울해서 ‘가지고 왔는데 너무 답답해서 벗어버리다가 다 찢어져버렸어요.’라고 대답도 했다.  

아주머니들은 아기를 보며 자신의 육아 시절을 떠올릴 것이고, 그 옆에 있는 나를 보며 자신의 힘들었던 때를 추억할 것이고 아저씨들은 귀여웠던 자신의 손주나 자식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초등학교 아이들, 아가씨들은 자신의 동생을 떠올릴 수도 있다.  


모두 자신의 경험이 아닌 아기가 가진 귀여움 자체에 빠져 쉽게 말을 걸기도 할 것이다.

귀여운 것들은 생각보다 쉽게 마음에 자리잡는다는 말을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

아기도 그 중 하나 아닐까, 귀여워서 쉽게 남의 마음에 문을 두드리고 어색함을 비집고 들어간다.

그 옆 아기 엄마인 나는

우리 아기에게 마음을 내어준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가끔 아기 목소리를 대신하다가 현타가 와도.. 기어이 기쁘게 보답을 하려고 노력해 보인다.

 비사교적일 때도 많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차가웠던 내가 아이를 가짐으로 강제로 사교적인 사람이 되어 타인과 대화를 섞고 함께 웃고 인사를 나누는 것이 참 신기한 일이다.


어쩌면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어쩌면 그 매개물이 필요한 게 아닐까? 모두 다 외로운 걸까? 시덥지 않은 생각도 해본다.

아기가 태어난 게 신기한 것처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변화도, 나의 변화도 문득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싫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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