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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와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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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심리스 Jun 19. 2021

잠에 대하여

나와 아기(2)

아기를 키우면서 가장 힘든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바로 ‘잠재우는 것.’이라 답할 것이다. 지금까지도 잠을 자지 않아 옆에 누에고치처럼 누워 자는 척을 하다 온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아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수면’이라는 것은 많은 책에서 봐서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 그에 관한 책을 찾아봤다. 하지만 책에서 읽은 내용과 아기가 실제 보이는 모습. 그리고 내가 그에 대해 반응하는 것은 전부 달랐고 그래서 책의 내용은 그냥 텍스트일 뿐인거구나. 느끼게 됐다.



태어나서 신생아 시기와 다섯달 정도까지 아기는 참 잘 잤다. 조리원에서 배운 누워서 수유하는 자세 덕분에 아이는 젖을 물고 쉽게 잠들었고 젖은 나에게 치트키였다. 게임을 하다가 어려운 상황이 오면 치트키를 쓰고 그걸 쓰면 그 위기를 쉽게 넘기거나 레벨업을 쉽게한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그게 바로 젖이었던 것이다. (슬프도다...)


잠을 잘 때면 어김없이 나는 치트키를 썼고 이렇게 쉽게 잘 자는 아이가 나에게 천사같이 와주었구나 감사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젖을 물고자면 치아 우식증에 걸릴 수 있고 편도선이 부을 수 있으며..'등등. 치아 우식증이 이빨이 썩는 것과 같은 말인 줄도 몰랐던 나는 무시무시한 부작용에 너무나 놀랐고 그래서 후회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너무나 많은 치트키 때문에 아기의 머릿속에는 젖=잠이 되어버렸다. 4개월쯤까지 나는 아이와 함께 잤다. 젖을 먹이다가 자연스럽게 잠들기 위해서는 넒은 자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아이와 둘이 자는 것을 택했다.


보통의 엄마들은 아이와 함께 몸 부대끼며 자는 것을 행복해하기도 한다는데 나는 도무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예민한 나는 아이와 함께 자면 오히려 밤을 새는 날이 많았고 나의 움직임으로 아이가 다칠까봐 전전긍긍하며 얕은 잠을 계속 자며 깨어있는 동안에도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항상 있었다. 그래서 결국 분리 수면을 시작했다. 처음 따로 잔 그 날, 나는 몇달만에 참 달콤한 잠을 푹 잤고 앞으로 아이에게 엄청 따뜻한 엄마는 못 되겠구나. 생각했다.






 분리 수면도 성공했고 젖이라는 치트키만 있으면 잘 잠들던 아이였는데 문제는 아이가 점점 크면서 나타났다. 6~7개월이 지나자 이제 아이는 젖을 주어도 잠들지 않았다. 결국 잠이 들지 못하면 나는 꼼짝없이 그 옆에 누워 젖을 계속 물리거나, 젖이 다 비워지면 잠이 들 때까지 그냥 기다려야했는데 그 시간이 나에게는 참 괴로웠다. 아이가 잠이 들지 않는 일이 이렇게 히스테릭하게 괴로운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나는 정말 괴로웠다. 숨이 안 쉬어지고 머리가 너무 아파 잠을 재우고 나오면서 나는 애가 안 자는게 이럴 정도로 괴롭게 느낄 일인지 내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왜 나는 아이가 잠에 들지 않는게 이렇게까지 괴로운 것일까.



 그 생각으로 나온 대답은


첫째, ‘아이가 잠에 들어야 하는 동안 내가 옆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누워있으면 내가 그냥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였다.


이렇게까지 괴로우면 안 되는 일에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이고 내가 이 일을 싫어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텐데 그게 바로 나의 ‘무가치함.’ ‘쓸모없음’이 이 시간에서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먹고 싸고 노는 것은 내가 직접적으로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 하지만 잠은 다르다. 젖으로 아이의 잠을 직접 돕지 못한다면 나는 그저 옆에서 시체처럼 누워 자는 척 하는 것. 그것이 나의 할 일이다. 누워 있는 것은 몸이 힘든 일은 아니지만 나는 이 때 아이가 나의 소중한 시간을 앗아간다. 나는 내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고 있다.



 두번째는 ‘아이가 자고난  내가 얻게  휴식 대한 강한 열망과 휴식이 없어진다는 것에 대한 강한 좌절감이다.


아이가 자게 되는 것은 엄마들 사이에서 ‘육퇴다시 말해 육아퇴근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쁜 일이다.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하며 버티며 떠올리는 것은 육퇴후에 느끼는 자유와 잠시동안의 행복이다. 그런데 아이가 잠들지 못하게 되면 나는  작은 행복마저 빼앗긴 비참한 하루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모유수유를 하고 있어 맥주도 못먹는 내게는 육퇴가  맥주도 아니었는데, 잠시라도 아이 없이 쉬고싶다는 열망이 너무 강해서 아이의 잠이 내게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었다.





혼자 아이를 봐야하는 시간들이 있었다. 온전한 독박육아란 정말로 괴로운 일이었고 그때마다 육아퇴근을 간절히 기다리던 나는 어느 날 11시까지 잠들지 못하는 아이에게 정말 히스테릭하게 화가 났다. 그래서 아이를 둔 채로 내 침대로 향했다. 범퍼침대를 넘지 못하는 개월 수의 아이였는데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소리를 칠 것같아서 잠시 자리를 피한 것이었다. 자리를 피해 내 침대에 누워있는데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 돌아보니 잠들지 못한 아이가 침대까지 쫓아와 매달리며 나를 찾고 있었다. 그 때 느낀 감정은 반가움도 기쁨도 아닌 ‘공포’였다.


아이가 잠들지 않고 범퍼침대를 넘어 이제 나의 공간에도 맘대로 들어와 귀여움을 뽐내는 것이 나에게 공포였던 이유는 앞으로 이런 휴식의 박탈이 내게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예감때문이었다. 아이는 작은 꼬마 경찰관이라서 그렇게 나에게 또 수갑을 채웠고 나는 또 귀여움에 웃음이 터지면서 기꺼이 수갑을 찼다. 아이를 다시 안고 또 내 시간을 힘껏 죽이러 가는 발걸음은 ‘내가 이렇게까지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었구나.’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내게 공포를 준, 귀여운 경찰관 등장의 순간.>





 오늘도 나는 하루종일 어떻게 아이 낮잠을 재우고 언제 밤잠을 재워야할지 끊임없이 계산했다. 아이가 잘 자야 내 히스테릭한 스트레스가 발동되지않기 때문에. 오늘은 너무나 재밌게 놀 일이 많아 낮잠을 아주 짧고 불규칙하게 잤고 그래서 좀 일찍 잠들기를 원했지만 8시 30분부터 9시 40분까지 아이는 잠들지 못했다.


나는 매일 같이 자기 전에는 구름 등을 켜고 10분 책읽기를 하고, 불을 끄고 작은 수유등을 켠 뒤 ‘오늘 밤 꿈속에서’, ‘안녕히 주무세요’ 책을 읽는다. 이제 너무 많이 읽어서 모든 내용을 다 외우지만 아이에게는 처음 읽는 책인 것처럼. 마음 속으로는 오늘은 제발 안녕히, 쉽게, 그리고 빨리 잠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지루하고 길고 긴 시간이 지나면 어느 날은 운좋게 빨리 잠들고 어느 날은 운나쁘게 늦게 잠이 든다. 그러면 나는 최대한 소리 내지 않고 아이가 깨지 않게 침대를 넘고 걸어서 방 밖으로 나와야 한다. 나오다가 깨는 순간은 어찌나 무섭고 좌절스러운지. 몇번 그것을 당해보면서 아이가 잠든 순간 투명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몸무게도 발자국도 소리도 없는 인간이 되어 방 밖으로 무사히 탈출해 육퇴 시간을 만끽할 수 있는 인간. 너무나 우습고 비참하게 조심스럽게 나오며 나는 또 너무 기뻐한다. 신이 내 모습을 본다면 웃을지, 불쌍히 여길지, 아니면 슬퍼할지 궁금해진다.


 

아무튼 오늘은 잠 때문에 너무 괴로웠고 힘들었고 지금은 또 잠이 무사히 들어 이 글을 쓸 수 있어 좋으면서 피곤하다.



 한 인간이 태어나 모든 것을 혼자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즉 부모의 기다림이 그때까지 지겹도록 있었다는 것. 그 기다림의 시간이 자신의 시간을 죽이는 일이라도 기다릴 수 밖에는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가까운 시일에 우리 아이가 혼자 잠드는 법을 무사히 체득하기를 너무나도 간절히 바라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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