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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심리스 Aug 31. 2021

빵굽는 아파트, 2001호 00맘

참새의 외딴섬 적응기

우리 집은 올해 입주를 시작한 신축 아파트다. 정들고 익숙했던 이전 아파트를 떠나 3월즈음, 이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많은 것들이 낯설어졌다.


크림빵이 참 맛있었던 빵집도, 라떼가 고소했던 카페도, 과일이 싱싱해서 좋았던 마트도, 아이스크림이 다양했던 슈퍼도.


참새방앗간 드나들듯 나는 그 가게들을 애정하며 아꼈다. 거기서 물건을 사고 좋아하고 먹으며 기뻐하는 게 일상이었던 나였는데.. (돼지...ㅋ)

이제 ‘나’라는 참새는 갈 방앗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외딴 섬에 남겨진 참새는 주위에 어떤 것이 있을지 모르니 행동반경이 아주 좁아졌다. 사랑하는 맛집 대신 고작 집앞 편의점에만 오가는 일상.


방앗간이 없는 허허벌판에 떡하니 내버려진 느낌이 처음에는 참으로 헛헛했다. 내 마음에는 신축의 새로움이 주는 편리성보다 동네의 낯선 분위기가 더 크게 불편함으로 자리잡았다.


하나씩 하나씩 빵집을, 카페를, 마트, 슈퍼 등등을 뚫어보려 이리 걷고 저리 걸어다녀봤지만 그걸 찾으려 할수록 나는 이전 살던 곳을 그리워할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와 언제까지 이사 전 아파트만을 그리워할 수없는 노릇이었다. 어찌저찌 마음을 붙여볼까 여기저기 삐대고 다니며 정붙이는 날들의 연속.




노력하며 찾아다니다보니 생각보다 이사 온 새로운 동네도 참 좋았다. 시설은 조금 낙후되어 있었지만 간혹 만나는 사람들의 따뜻함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

인테리어가 촌스러웠지만 친절한 사장님 부부가 너무도 좋은 정겨운 카페도 있었고, 와사비 샌드위치가 맛있는 빵집도 있었고, 김밥이 너무도 싸고 맛있는 김밥집도 있었다. 너무나 친절한 간호사 언니가 있는 소아과도 뚫었다. 새로 정붙인 곳에서 감동 받은 일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소아과 간호사 언니가 아이를 눈에 기억해두고 이름을 불러주었다.

“00이 왔구나, 오늘 주사 잘 맞았으니 사탕줄게~”


-약국 점원이 갈 때마다 아이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키티가 그려진 비타민을 쥐어주었다.


-어쩌다 아이 얼굴에 멍이들어 약국에 멍 연고를 사러갔는데 양심적인 약사 아저씨가 눈에 들어가면 큰일 난다고 기어코 약을 팔지 않으셨다. 나중에 쓴다고 해도 기어이 구매를 거절하신다.


사소하지만 당연하지 않고 쉽지 않은 친절과 환대가 감동을 불러왔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이 곳을 좋아하게 만들수밖에 없는 빵굽는 2001호. 그 덕에 나는 내가 사는 곳에 마음을 붙이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우리 아파트에는 단체 카톡방이 있다. 입주 시기의 자잘한 것부터 중차대한 일까지. 입주자 카페뿐 아니라 이제 카톡방에서도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구조다. 하자 점검을 해야하는 시기라 카톡방의 분위기는 대부분 날카로우며 무겁고 불만투성이다. 뾰족뾰족 하나 둘 자신의 집과 아파트 구조, 관리의 문제점등을 단톡방에 이야기한다.


관리소장님과 동대표들, 그 문제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답변을 내놓고, 대부분이 문제 - 해결의 크리티컬한 내용인 차가운 대화들.


그 속에  불쑥 신기한 내용이 떴다.

(톡방의 이름은 실제 동, 호수를 밝혀야만 해서 어디 사는 누구인지가 다 보인다.)


먹음직스러운 빵 사진이 뜨더니  


102동 2001호 00맘 :

“빵좀 드세요. 밤식빵이예요. 방금 구워 따뜻해요.”


잠깐의 정적 후

105동 000호가 말했다.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109동 000호도 말했다.

“저도요”


102동 000호 아내가 말했다.

“우와 같은 동이라 넘 좋네요. 저도 먹어보고 싶어요.”


104동 00호도 말했다.

"늦었네요. 102동 안 사는게 이렇게 아쉬울 줄이야! 부럽습니다~"


갑자기 아파트의 베란다 누수, 곰팡이, 손잡이 문제, 경차 자리 주차문제 등등이 난무한 톡방에 구수한 빵의 향기가 솔솔 났다. 괜시리 웃음이 났다.


빵을 굽는 분은 102동의 2001호 00맘.


다양한 빵나눔의 흔적들

어느 날은 밤 식빵, 어느 날은 머핀, 초코케이크, 고구마케이크, 사과 파이. 한 번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조건 없는 빵 나눔이 계속 되었다. 구울 줄 아는 빵도 많아서 간혹 올라오는 빵 사진만 봐도 왠지 기분이 좋았다.


주차장의 담배꽁초 신고, 불법 주차 신고, 엘레베이터 고장, 누수 하자의 홍수와 컴플레인으로 얼룩진 카톡방에서 단연 빛나는 빵 사진들.


항상 바라보기만 하다가 어느 날인가 나도 용기를 내어 빵에 손을 들어보기로 했다.


“카스테라 드세요~”

“오~ 저 가도 될까요? 아기랑 바로 갈게요.”


“초인종 눌러도 괜찮을까요?”

“네~ 누르세요.”


그 날도 역시 부리나케 빵에 손을 드는 사람이 많았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102동으로 향했다.


딩동! 누르고 어렵게 집 앞에 들어섰다.

같은 아파트이지만 보안이 삼엄해 모르는 동에 출입하는 건 처음이었다.

‘아, 102동은 이렇게 생겼구나.’


102동의 20층에 도착했다. 신기하게 그 집 앞에는 의자 위에 큰 갈색 빵 접시가 놓여있었다. 그 접시는 나눔의 장이며 보답의 장이며 아파트의 따뜻함이 결집된 작은 공간이었다.


감사함의 표시로 음료를 들고 왔는데 아쉽게도 선착순 빵 나눔은 끝나버렸다. 누군가의 보답품이 접시에 올려져있길래 나도 가져온 음료를 올려두었다. 그냥 삭막한 카톡방에 빵 냄새를 구수히 풍겨주셔서 감사한 마음이었다.


빈손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문이 빼꼼 열린다.


“저기요. 잠시만요. ”

그 집 큰 딸이 나왔다.

“아, 제가 늦어서 빵이 다 나갔네요. 매번 넘 따뜻하게 나눠주셔서 음료수라도 가져왔어요. 놓고갈게요.”

하고 나오는데


“여기여기 잠깐만요! 이거요 엄마가 하나 남았대요~” 하며 빵을 쥐어준다.

너무나 염치가 없었던 것은 아닌지 자괴감이 들긴 하지만.


우리 아파트에서 그리도 핫한 아파트 빵맛을 드디어 볼 수 있다니 왠지 설레는 마음.

 

“너무너무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아이와 돌아가는 길에 조금 떼어 먹어보았다. 아이도 한 입 떼주니 그리 잘 먹을 수가 없다.


구운 빵 솜씨도 보통이 아닌 것이 제과제빵을 준비하시는 분인지. 빵집 오픈을 앞두고 계신지 알수는 없지만 묻는 것도 실례일까 싶어 여쭤보지는 못했다.


아이와 식탁에 앉아 맛난 빵을 뜯어먹으며 문득 뜨듯한 감사함이 마음에 번진다.


아무런 대가 없는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을 집 가까이에 두고 산다는 느낌.


감사한 일이 생겨 나 또한 감사함을 전하고 보답할 일이 무엇인지 찾는 일도 참 좋다.


보안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앞 집이 누구인지 알고 살기도 어려운 지금,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 문을 열어 빵을 구워 대접하는 일.


요즘 세상에는 쉽지도, 흔하지도 않은 일이라 나의 고요한 일상에 작은 울림을 던져준다.

빵을 나누고 그걸 가져간 사람들의 작은 보답이 집 앞에 오밀조밀 모여있었다. 그 작은 보답을 바라보는 것도 참 잔잔한 감동이었다.


가는 길에 아파트를 배경으로 빵 사진을 찍어 감사의 마음을 올렸다.  빵집을 꿈꾸고 계신다면 부디 멋진 파티셰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이 생긴다.



딩동, 오늘은 고구마케이크와 고구마식빵을 구웠다는 카톡이 왔다. 모르는 사람의 빵굽는 아파트 102동 2001호로 유모차를 가지고 간다.


급히 집에 있는 보답품을 찾는데 마땅한 게 없어 슈퍼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감사하다는 포스트잍 메모와 견과류 몇 봉을 들고서.


아이와 기분 좋은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나는 따뜻한 아파트에 산다.

이제 나는 외딴 섬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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