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가지 않기 위한 복기②
결혼 전, 시어머니는 사주를 빌미로 우리의 결혼을 반대했다. 남편과 나는 연차를 쓰고 한 달 내내 서울 전역의 유명한 철학관을 찾아다녔다. 남편이 매일 궁합을 보고 온 녹음파일을 보내며 설득하려 했지만 시어머니는 듣지 않았다. "사이비 철학관에서 너희 둘이 좋다고 손을 꼭 붙잡고 갔는데 궁합이 안 좋다는 말을 하겠니?"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건 설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 시어머니 마음 속엔 이미 결론이 나 있었다.
그 뒤로는 남편이 혼자서 철학관에 다녔다. 시어머니가 이조차 믿지 않아서 나중에는 남편이 시아버지를 함께 모시고 다녔지만 결과는 같았다. 나는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시어머니가 다녀왔다는 바로 그 철학관에 가서 같은 사주로 이번에는 궁합이 좋다는 해석을 받아 녹음했다. 시어머니가 믿는 논리가 틀렸음을 증명하면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끝까지 본인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며칠 후 “너희가 너무 힘들어해서 내가 마음을 바꾼 것”이라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시누이와 시아버지는 각자의 방식으로 어머니를 설득하려 애써주었다. 시누이는 시어머니의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설득을 부탁했고, 시아버지는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을 찾아가 아내를 설득해달라 도움을 청했다. 그렇게 모두가 "내가 너희 결혼 시키느라 어떻게까지 했는데!"라는 강력 무기를 장착하게 되었다.
남편의 가족들은 시어머니와 직접 대화를 하지 않는다.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어머니를 설득해야 할 상황이 있다면 그녀가 귀를 기울일 만한 제3의 누군가를 찾는다.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거나, 대단히 권위가 있거나, 그녀가 인정하는 누군가를 말이다.
나는 이런 소통 방식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대화가 안 되는지, 왜 설명하면 할수록 더 꼬이는지, 왜 평생을 함께 살아온 가족들조차도 대화를 어려워하는지.
상담사에게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돌아온 대답은 단순했다.
“나르시시스트는 대화를 하지 않아요.”
그들에게 대화란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접점을 찾는 과정이 아니다. ‘내가 옳다’는 증거를 수집하고 상대를 굴복시키는 전쟁터다. 오해를 풀기 위한 해명은 어느새 상대방을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는 공격의 빌미가 될 뿐이다.
겉으로는 논리적인 듯 보이지만, 잘 들어보면 사실과 다르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말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상대방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모르겠고, 억울해서 해명을 하면 그 해명이 또 다른 공격거리가 된다.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이 고통을 털어놓자, 상담사가 나에게 되물었다.
"속이 빈 수레는 원래 시끄러운 법이에요. 가치 없는 소음에 왜 일일이 해명하려 하나요?"
내가 상대하고 있던 것은 논리가 아니라 소음이었다. 빈 수레가 요란한 소리를 낸다고 해서 그 수레에 귀한 것이 담겨있는 건 아니다. 억울해할 필요도, 반응할 필요도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안은 남았다. 침묵하면 오해를 인정하는 꼴이 될까 봐, 남편마저 어머니의 말을 믿게 될까 봐 두려웠다. 상담사는 그 지점을 정확히 짚었다. 시어머니가 무서운 게 아니라, 그 시선을 통해 내가 어떻게 보일지가 무서운 거라고.
"며느님은 혈육이 아니잖아요.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해요. 남편은 도끼질을 해도 안 끊기는 혈육이지만, 며느리는 언제든 끊길 수 있는 남이에요. 그래서 굳이 잘 보일 필요가 없어요."
차갑지만 명확한 진실이었다. 시어머니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것은 내 통제 영역 밖의 일이다. 주변 사람들은 이미 시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 내가 지켜야 할 것은 오직 남편과의 관계뿐, 시댁 전체의 인정을 받으려는 목표는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그 이후 나는 상대를 설득하려 하기보다 나의 방식을 선언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선을 넘는 말에 우아하게 대처하는 법]
"왜 전화 자주 안 하니!"라는 압박에는 "어머님, 저는 숙제처럼 하는 전화는 못해요. 제 마음이 어머님을 궁금해할 때 기쁘게 할게요."
"너가 잘 못해서 가르쳐주는데 왜 나아지질 않니!" 라고 하면 "글쎄요. 어머님 생각을 어떻게 다 맞춰드려야 할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 이때 표정은 억울해하지 말고, 정말 평온하게 "그러게요, 제가 어머님 기대만큼 해낼 재주가 부족한가 봐요"라며 어깨를 으쓱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어떻게 감히 자식이랑 부모가 싸웠다는 표현을 쓰니!" 라며 말꼬리나 표현을 트집 잡는다면 가볍게 웃으며 "표현이 불편하셨나 보네요. 그런데 상황을 설명하기에 그보다 정확한 단어를 찾기 어렵네요." 라고 하며 상황을 사실관계로 고정해버리는 것이 좋다.
시누이가 "내가 너때문에 엄마 비위 맞추느라 얼마나 힘든 줄 알아? 경제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이제 나도 지쳐!" 라며 죄책감을 심어줄 때도 마찬가지다.
"니들이 싼 똥 내가 다 치우고 있다"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다르다더니, 결혼 시켜달라 할 때는 언제고 결혼 하고 나니 태도가 싹 바뀌었다" 등 막말을 하더라도 "힘드셨겠네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라고 말해주면 그만이다. 그녀의 짐을 내가 대신 짊어질 의무는 없다.
그 집안에서 일어난 어떤 일에 대해서도 내가 책임질 일은 전혀 없다. 핵심은 이것이다. 그 집안의 갈등을 내 것으로 가져오지 않는 것.
"그렇게 대꾸하면 큰 싸움이 나지 않을까요?" 나의 걱정에 상담사는 웃으며 말했다.
“싸우는 건 어머님 혼자 싸우는 거예요. 본인은 싸우지 마세요.”
상대가 소리를 지르면 듣지 않고 그 자리를 뜨면 된다. “저는 제가 중요해서 이 자리에 더 있을 수 없어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말하고 나오는 것. 처음에는 도망처럼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관계의 주도권을 가져오는 행동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반드시 데리고 나오고, 남편에게는 미리 이야기해 두었다. 나는 내 몫의 도리는 하되, 나를 해치는 상황까지 감내하지는 않는다.
나르시시스트와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나의 오만이 사라지자 평화가 찾아왔다. 상대는 더 화를 냈지만 나는 덜 힘들어졌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대화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듣되 받아들이지 않고, 보되 해석하지 않고, 겪되 내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단 하나, 남편과의 관계만 지킨다. 그 외의 관계는 더 이상 나를 증명해야 하는 무대가 아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도 괜찮은 건지.
하지만 나와 나의 가정은 내가 스스로 지켜야 한다. 피하지 않되, 반응하지 않는 방식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직면하는 이유는 죄책감 없이 나를 지키기 위해서다. 죄책감이 없으면, 흔들리지 않고 눈을 마주칠 수 있다.
유약해 보이지 말자.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자.
타인의 말과 감정을 내 것으로 가져오지 말자.
그것은 그들의 몫이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나로 존재하면 충분하다.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를 먹잇감으로 삼는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는 피하는 것이 가장 최선이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이유로 끊을 수 없는 관계도 있다.
그럴 때 상대가 바뀌기를 기대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관계를 끊는 대신 나를 지키는 선을 긋는 방법을 배웠다.
그 선 하나가 내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다음 이야기에서 이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