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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천국인 것 같다

by 보리차

이번 여행 내내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 근처의 호텔은 우리의 베이스캠프가 되어 주었다. 아테네 근교의 고린도와 수니온곶은 당일치기로 다녀왔으니 당연하겠지만, 산토리니를 본 후에도 아테네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크레타를 다녀온 후에도 아테네로 돌아왔다. 산토리니에서 아테네로 다시 돌아왔던 것은 오페라를 보기 위해서였다. AD 161년에 완공되었다는 석조 로마식 음악당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에서 한여름 밤 ‘토스카’를 볼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2년 전 텅 빈 시칠리아의 타오르미나 극장, 4년 전 아무도 없던 드넓은 탈린의 Song Festival Grounds를 보며 '이곳에서 실제 공연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던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경험이었다.

20220729_001550.jpg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에서 '토스카' 공연이 끝난 후의 커튼콜


다음날 우리는 항공편으로 크레타 섬으로 향한다.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이자 지중해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 유럽 문명이 시작된 장소로 여겨진다는 섬. 이번 여행에 착수하기 전까지 듣도 보도 못했던 섬. 비행시간은 단 35분. 헤라클리온 공항에 내린다. 크레타를 방문한다면 가장 큰 도시인 헤라클리온과 하니아를 들를 것이고 우리는 각 도시에서 2박씩을 하기로 한다. 크레타의 주도이자 가장 큰 도시인 헤라클리온에 예약해 둔 숙소 위치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객실에서 바로 베네치아 항구와 베네치아인들이 건설했다는 요새가 보인다. 그리고 바로 숙소 코앞이 유명한 레스토랑들이 즐비한 거리이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그리스 해산물과의 만남이 기대되는 곳이다.


오후 6:30경, 숙소 밖으로 나간다. 몇 걸음 걸으니 베네치아 항구.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늦은 오후의 온화한 햇살이 닻을 내린 채 정박해 있던 하얀 요트들과 잔잔하게 출렁이는 바닷물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엄마의 한마디.

“아!! 여기가 천국인 것 같다.”

그래. 나도 왠지 크레타에 가면 순전한 행복과 만날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정말 그런 거 같다. 우리가 아테네로 돌아갈 때 타게 될 블루스타 페리의 정박해 있는 모습도 믿음직스럽게 느껴진다.

20220729_190007.jpg 헤라클리온의 베네치아 항구


눈앞에 보이는 요새로 걸어가 본다. 13세기 크레타가 베네치아의 통치하에 있었을 때 지어졌다는 일명 베네치아 요새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헤라클리온을 지키기 위해 건설되었단다. 내부로 들어가 보니 지금은 헤라클리온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요새 위로 올라가 본다. 그곳에서 360도로 둘러보며 바다와 도시와 요새의 성벽을 감상한다. 점점 붉어지는 주위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이 좋아지게 한다. 숙소를 향해 돌아오는 길에는 낙조를 본다. 제법 거세게 출렁이는 바다에 내려앉으며 더욱 커지던 붉은 태양이 사위를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성채 사이의 구멍으로 보이는 아장아장 걷는 아기와 낙조를 감상하며 앉아 있는 엄마가 여운을 남긴다.


20220730_200305.jpg 베네치아 요새가 보이는 베네치아 항구


헤라클리온을 떠나는 아침, 택시로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후, 버스를 타고 바닷가 길을 따라 이틀간 묵었던 숙소 앞을 지나는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감정에 휩싸인다.

‘아! 헤라클리온이 이렇게 그리울 줄은 몰랐다’

아직 헤라클리온을 벗어나기도 전인데 말이다. 바다가 보이던 숙소, 그리고 메릴 스트립을 연상시키던 멋쟁이 숙소 주인도 그립다. 그러나 그리 아쉬워할 필요가 없었다는 걸 2시간 반 후에 알게 된다. 거의 똑같은 모습의 하니아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니아에도 헤라클리온과 같은 이름의 베네치아 항구가 있고 해안을 따라 시푸드 음식점들이 즐비하며, 랜드마크로는 헤라클리온의 요새 대신 하니아 등대가 있다. 그곳에서 엄마와 나는 아름다운 하니아를 3일 동안 눈으로 귀로 그리고 가슴으로 감상하고 또 감상한다. 선셋을 감상하며 그리스 해산물 요리를 즐기는 호사를 누리고, 음식점마다 내주는 각양각색의 그리스 디저트를 기다리는 재미를 맛보고, 꾸역꾸역 밀려드는 유럽인들을 구경한다. 정말 그랬다. 전 유럽의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은 모두 여름휴가를 하니아로 오나보다. 밤 12시가 가까워지는 시각에도 좀처럼 여행객들의 수가 줄어들지 않는 것을 숙소 베란다에서 내려다본다.


20220801_213131.jpg 밤이 깊어가도 줄어들지 않는 하니아 방문객들


아테네로 돌아갈 때에는 배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터. 근처의 수다(souda) 항으로 간다. 타고 갈 블루스타 페리가 기다리고 있다. 겉에서 보기에도 무척 큰 배이다. 배를 타본 경험이 많지 않지만 이것은 정말 큰 배인 것이 틀림없을 듯하다. 배 입구에서부터 긴 에스컬레이터를 세 개나 타고 올라간다. 내가 묵게 될 선실은 6층 덱에 있다. 리셉션에서 열쇠를 받아 선실을 열어본 순간, 너무 좋다. 넓은 침실, 두 개의 싱글베드, 폭신폭신한 하얀 이불, 그리고 책상과 옷장과 샤워부스까지 갖춘 선실. 호텔 숙소와 다를 바 없다. 선실 창밖으로 일몰이 시작됨을 깨닫는다. 부랴부랴 8층으로 올라가 갑판으로 나간다. 이렇게 크레타 섬의 마지막 선셋은 갑판에서 감상한다.


8층과 7층을 내려오며 구경한다. 넓고 다양한 공간과 시설을 갖춘 큰 여객선이다. 계단에서 담요로 자신의 구역을 설정하고 이미 누워 잠잘 채비를 마친 사람, 덱 의자에서 그냥 자는 사람, 레스토랑에서 먹고 떠들며 밤을 즐길 사람,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어디에서건 즐겁기만 하다. 밤 10시 넘어 배가 출항한다. 깜깜한 물 위의 하얀 물보라를 보며 꽤 빠르게 달리고 있음을 확인하고 선실에 들어가 잠을 청한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배가 이미 목적지인 피레우스항에 정박한 상태다. 아침 6시다. 이렇게 배에서 꿀잠을 자다니.


아테네에서 하루를 더 머물며 여행이 끝나가는 아쉬움을 달랜다. 고린도에서 잠깐 구름 한 점을 본 이후, 아테네에서 흰 구름을 다시 본다. 그동안 오다니던 길들을 다시 걸어보며 깨끗하고 소박하며 유서 깊은 아테네라는 도시의 매력을 곱씹어 본다. 숙소 바로 앞 약국에서 코로나 신속항원검사를 받고 음성 확인서를 발급받는다. 늘 다니던 숙소 근처 한국 음식점에서 그동안 먹었던 비빔밥과 잡채를 저녁으로 먹는다. 마지막 날이니만큼 그동안 다녔던 곳들을 다시 다닌다.


다음날 아침 그리스에 정이 들었음을 또 확인하게 된다. 오랜 기간 머물렀던 호텔 직원들과의 작별도 아쉽고, 호텔 골목을 빠져나오며 자꾸 뒤를 돌아보는 나를 발견한다. 익숙한 신타그마의 X95 공항버스 타는 곳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으며 신타그마 동네와의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을 달래본다. 오전 9시다. 목요일이다. 공항 티켓 파는 부스,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파는 가판대. 그리고 길 건너의 신타그마 광장.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 지금 이곳의 사람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을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이곳과 이 사람들의 일상을 공유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마음이 이상하다. 공항버스 탑승하기 전 올려다 본 아테네의 하늘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구름 한 점 없는 투명한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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