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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붙여 놓으세요. 그곳에 가게 된답니다.

by 보리차

내 방 벽지에 약간 손상이 간 적이 있다. 엄마는 달력에 있던 그림 한 장을 그곳에 붙여 놓으셨다. 무심한 나는 한 번 쓱 본 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은 엄마가 다녀온 적 있는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게이트웨이 아치’였다. 그 그림과 함께 산 지 얼마나 되었을까. 2010년 8월 나는 서울특별시교육청 지원 6개월 파견 연수 대상자로 선정되었고, 얼마 후 파견 연수지가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라는 것을 알고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어 교사이니 미국에서 연수를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 넓은 미국에서 세인트루이스라니. 내 방 벽에 붙여둔 세인트루이스의 아치를 직접 가 보게 될 줄은 몰랐었다.


비슷한 일은 사실 그 이전에도 있었다. 2006년. 그때까지 해보지 못했던 유럽 배낭여행의 꿈을 실현했던 여름. 내 방 책상 위의 탁상달력이 유럽 여행을 주제로 12장의 그림을 담고 있었다는 것을 여행에서 돌아온 후 깨달았었다. 2022년. 거짓말처럼 나의 탁상달력 7월에는 산토리니 이아성의 해 질 녘이 담겨있다. 그리고 2022년 7월 27일 나는 똑같은 장면을 두 눈으로 감상하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2001년 모 음료 광고의 배경이 되어 알려진 산토리니에 대한 로망이 있는 듯하다. 온통 흰색과 파란색만이 넘실대어 몽환적인 느낌마저 들던 그곳. 튀니지의 시디 부 사이드를 다녀온 이후로 산토리니도 언젠가는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바로 다음 행선지가 산토리니가 될 줄은 몰랐다. 북아프리카의 산토리니라 불리우는 시디 부 사이드. 온통 흰색과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던 그곳. 그리고 역시 흰색과 파란색 이외에는 세상에 더 이상의 색상이 없는 듯한 지금 이곳 그리스의 산토리니. 두 곳 모두 우리가 방문하던 순간, 하늘마저 짙푸른 파란색이어서 지중해와 에게해의 절경을 완벽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보통 산토리니 여행을 준비할 때에는 피라 마을과 이아 마을을 비교하며 어디에다 숙소를 정할 것인지를 연구하게 된다. 산토리니에서 2박을 해본 나로서는 일출을 보고 싶다면 피라 마을을, 일몰을 보고 싶다면 이아 마을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산토리니 하면 떠오르는 광고나 책 속의 유명한 장면을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이아 마을을 택해야 한다.


엄마에게 여태껏 가장 좋았던 숙소가 어디냐고 물으면 산토리니 피라 마을의 숙소라고 하신다. 화려하진 않지만 깔끔하고 정갈했던 숙소. 그냥 피라 마을 속의 주민이 된 듯한 느낌을 갖게 했던 숙소. 침대에 누워 열어젖힌 문으로 한 눈 가득 들어오던 산토리니의 바다, 그리고 쏴아아 쏟아져 들어오던 시원한 바람. 그곳이 우리 엄마의 최고의 숙소가 된 까닭은 에게해의 일출을 선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침 6시 20분. 엄마가 나를 다급하게 깨운다.

“일어나! 해뜬다. 해떠!”

여기가 어디인가 생각해 본다.

‘아! 산토리니구나.’

정신을 가다듬으며 일어나 엄마가 가리키는 곳을 본다. 아!! 해가 떠오른다. 산토리니의 일출을 침대에서 일어나며 바로 보다니. 최고의 숙소가 이곳이 맞다. 엄마는 어제 산토리니에 도착하며 산토리니의 지형을 파악해 두고 계셨다. 배를 타고 산토리니로 들어왔더라면 유명한 지점들이 몰려있는 서쪽 부분만을 산토리니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비행기로 들어오느라 동쪽에 있던 공항에서부터 피라 마을의 숙소로 이동을 하며 엄마는 산토리니 섬 전체의 규모와 지형 등에 대한 감을 잡고 내심 일출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기다렸던 거다. 캄캄하여 드문드문 불빛이 남아있던 이른 새벽부터 서서히 어둠이 걷혀가던 순간을 홀로 만끽하고 계셨다. 그리고 하늘의 한 부분이 뻘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고서는 그곳에서 태양이 떠오를 것을 예감하고 기다리셨고, 마침내 태양이 나타나는 순간 나를 깨우셨던 거다. 온전히 똑똑하고 부지런한 엄마 덕분에 산토리니의 일출을 보는 기쁨을 누린다.


20220727_062122.jpg 피라마을 숙소에서의 산토리니 일출


예상치도 못했던 산토리니의 일출을 보았으니 이제는 이아 마을로 옮겨 산토리니의 일몰을 맞을 준비를 한다. 풍차가 보이는 이아성의 뷰포인트에서 기다린다. 온 세계인들의 휴가철인 만큼 다국적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책상 위 7월 달력이 보여주던 그 장소가 눈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서서히 하강하는 태양과 그 아래를 유유히 지나가는 배가 환상에 환상을 더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최고로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일몰이 다가온다. 그곳에 모여든 수많은 인파들이 함께 그 순간을 숨죽여 감상한다. 일몰이 시작되기 전 전 세계의 언어가 왁자지껄 들리던 그곳에 일순간 고요가 찾아온다. 모두가 평생 기다려온 순간이었으리라. 태양이 바다 너머로 완전히 넘어가는 그 순간 “와!!! 브라보!!!”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탄성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다. 여기저기 곳곳에서 수많은 세계인들이 모두 다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숨을 멈추었다 터뜨리는 탄성. 또 한 번의 잊지 못할 선셋이 가슴속에 아로새겨지는 순간이다. 선셋으로 물들었던 붉은 하늘이 파란색을 띠다 까맣게 되며, 야경의 불빛으로 수놓아지는 산토리니의 밤을 누리느라 한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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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7_202342.jpg 이아마을에서의 산토리니 일몰과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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