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코로나가 아직 우리 곁에 있긴 하지만 2년을 지나며 어느덧 그 공포감에서 벗어나고 있는 우리. 시칠리아에서 2020년 2월 멈추었던 우리의 여행을 재개해 볼 때가 되었다는 판단을 한다. 이제 엄마는 한국 나이 80세가 되었고 나는 50대에 안착하였다. 80대와 50대 모녀의 자유여행. 분명 흔치 않으리라. 그러나 우리가 한번 해 보리라.
코로나에 대한 불안감을 가장 먼저 떨쳐버린 듯한 그리스를 이번 여행의 행선지로 결정하고, 두 번째로 그리스를 방문하게 되는 엄마가 이전에 다녀오지 않은 곳 위주로 여행 루트를 짠다. 서양 문명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아테네를 내가 지나칠 수는 없으니 아테네에 머물며 이전에 엄마가 다녀오지 않은 고린도와 수니온곶을 다녀오기로 한다.
어린 시절 63빌딩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나이애가라 폭포에 관한 영상을 엄마와 관람한 후 내가 엄마에게 이렇게라도 엄마가 나이애가라 폭포를 볼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고 한다. 종종 세계 3대 폭포를 언급하던 엄마가 그곳들을 무척 보고 싶어한다고 여겼고,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된 1988년 이전이었으니 나이애가라 폭포를 직접 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터였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엄마는 세계 3대 폭포를 다 직접 보셨다. 그리고 가끔 63빌딩 아이맥스 영화 이야기를 하며 웃곤 한다. 그럼 세계 3대 운하는 어떤가.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파나마 운하, 에게해와 이오니아해를 잇는 코린트 운하. 나는 어린 시절 엄마에게 운하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분명 운하에도 관심이 많으신 엄마지만, 세계 3대 운하는 보신 적이 없다. 그래서 이번에 그 중 첫 번째 운하를 보기로 한다.
정확하고 편리한 아테네 전용 택시 앱을 이용하여 키피소(Kifisos) 버스 터미널에 도착한다. 여기서 고속도로를 타고 왼쪽에 펼쳐지는 바다를 감상하며 1시간 정도 남서쪽으로 달리면 코린토스에 도착한다. 성경에 나오는 고린도가 바로 이곳 코린토스라는 것을 지금 알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 세계 3대 운하 중 하나가 건설되었다는 것도. 사람이나 물건을 배로 실어 나르기 위해 내륙에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 이오니아해의 코린토스만과 에게해의 사로니코스만을 이어주는 길이 6.4km, 폭 24.6m, 그리고 가파른 벽의 높이가 79m에 달하는 좁은 수로를 지닌 가장 깊은 운하다. 고대 로마 시대 네로 황제부터 파기 시작해서 몇 번의 좌절과 새로운 시도 끝에 1893년에 이르러 완공되었다는 운하. 이 운하가 완성됨으로써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와 아드리아해의 항로를 320km 단축하였다고 한다.
버스는 운하를 지나자마자 곧 정류장에 멈추었고, 운하를 스치던 그 찰나 바로 그곳이 코린토스 운하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몇 걸음을 되돌아 걸으니 눈앞에 운하가 모습을 드러낸다. 다리 위에서 수직으로 판판하게 깎아 높은 벼랑 사이의 짙은 에메랄드빛 수로를 내려다본다. 인간이 만들어 낸 물길. 인간이 바다를 움직이는구나. 아테네에서 78km 떨어진 코린토스에 우리는 오직 이 운하를 보기 위해 왔다. 그리고 그 가치는 충분하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같은 도로변 다리 위였지만 그 다리 위에서 한참을 머문다. 그리스에 들어온 후 처음 보는 흰 구름 한 점이 떠 있는 하늘과 아름다운 빛깔의 수로를 번갈아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면서 그렇게 서 있다. 바로 그때 기적처럼 한 척의 배가 수로 위에 나타난다. 흰색과 살구색이 인상적인 3층짜리 관광용 선박이다.
“와!! 배가 지나간다!!”
탄성을 지르며 엄마와 나는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인간이 절벽을 뚫어 만들어 낸 수로의 쓰임을 목격하는 순간이다. 엄마와 나는 이제 세계 3대 운하 중 하나를 보았다. 나머지 2개도 보러 갈까나.
다음 날 다시 한번 택시를 타고 이번에는 아티키스(Attikis) 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시각이 오후 1시 35분을 가리키는데 버스 출발 시각은 2시 30분이란다. 그 순간 7월의 아테네는 섭씨 35도이다. 이글거리는 햇빛 속에서 화상을 입을까 두려웠지만 이렇게 쨍한 순간이 좋은 걸 어쩌랴. 한국에서의 습도 있는 폭염도 즐기는 나에겐 습도 없는 유럽의 여름은 기다리는 그 시간도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아티카 지역의 최남단 수니온곶을 향해 2시간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오른편에 내내 펼쳐지는 해안선. 그 해안선을 따라 곳곳의 백사장에서 일요일을 즐기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행복한 모습이 땡볕에서의 기다림을 상쇄시킨다.
수니온 곶에 도착한 시각은 4시 30분. 뜨거움을 피해 곧장 카페 안으로 들어선다. 그곳에서 절벽 위 포세이돈 신전을 올려다본다. BC 440년경 아테네인들이 포세이돈에게 바쳤다는, 지금은 도리아 양식의 기둥만이 남겨져 있는 신전. 그것을 보기 위해 오늘도 70km를 달려왔구나. 포세이돈 신전의 기둥 밑 부분에 이곳을 방문했던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Byron)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데 찾아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카페에서 무사카를 주문하여 먹으며 바이런의 흔적도 함께 음미한다.
Place me on Sunion’s marbled steep (수니온의 대리석 절벽에 나를 놓아줘)
Where nothing save the waves (파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
There swan like let me sing and die! (거기서 백조처럼 노래하며 죽게 해줘!)
바이런의 시구가 무사카 접시 아래 종이 매트 위에 적혀 있다.
작열하는 태양을 왜 그리 두려워했던가. 엄마와 나는 7시 15분이 되어서야 카페에서 나와 포세이돈 신전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어머나! 카페에서 바라볼 때에는 신전까지 가려면 상당히 먼 거리를 걸어 올라가야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 카페와 신전 입구는 매우 가깝고 몇 걸음 올라가지도 않아 신전이 눈앞에 나타나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엄마가 진작 올라오지 않고 카페에서 시간 때우고 있었던 것을 무척 아쉬워한다. 이제 곧 해가 떨어지니 환한 빛 속의 포세이돈 신전과 바다를 여유 있게 감상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긴 하다. 그러나 선셋 직전의 햇빛이 피사체를 가장 아름답게 보이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포세이돈 신전에 도착한 것이 바로 그때다. 사라지기 직전의 태양이 신전에 은은한 붉은 빛을 던진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의 신전을 바라보고 있다. 파란 하늘과 은빛으로 물들어가는 에게해와 붉은 빛을 온몸에 머금고 있는 포세이돈 신전을.
8시 30분 버스를 타고 아테네의 숙소로 돌아가야 해서 일몰 후의 감동까지 누릴 순 없지만 태양을 움직이는 포세이돈 신전의 위용에 압도된 채 버스에 오른다. 버스에서도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시킨다. 내 눈에 들어오는 바다는 여태껏 본 적 없는 바다다. 수평선을 따라 흰 띠가 계속 이어지는 듯한 허연 바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바다가 이 세상의 바다인지 아닌지 헷갈린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나를 배웅하며 보여주는 신화 속 바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