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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난 더 할 수 있는데...

by 보리차

시칠리아 제2의 도시 카타니아에서 제1의 도시 팔레르모로 버스로 이동 후, 이곳 팔레르모를 이번 여정의 마지막 기착지로 삼는다. 카타니아, 타오르미나, 팔레르모... 모두 이전에는 들어 본 적 없는 지명이지만 ‘체팔루’란 지명은 들어본 적이 있다. 바로 ‘시네마 천국’이란 영화 덕분일 것이다. 팔레르모에서 기차로 45분 걸려 체팔루역에 도착. 체팔루 마을을 부지런히 걸어 내려가 해안가에 다다른다. ‘시네마 천국’에서 마을 주민들을 불러 모아 영화를 상영하던 그곳에서 한참을 머무른다. 맑은 하늘, 투명한 에메랄드 물빛, 그 위에 쏟아지는 끊임없이 반짝이는 햇살의 일렁임을 나는 넋 놓고 바라본다. 엔리오 모리꼬네의 ‘Love Theme’이 내 귀에 들린다. 얼마 동안 그러고 있었을까. 불현듯 엄습해 오는 현실. 너무 행복한 순간이면 이 순간이 달아날까 오히려 걱정을 하게 되는 나. 이 여행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현실이 퍼뜩 떠오르며 분명 귀에 들리던 ‘Love Theme’도 멈춘다.

20200218_110200.jpg 체팔루의 물빛


그러나 체팔루의 물빛은 다음날 아그리젠토의 봄꽃으로 이어진다. 아그리젠토를 갈까 말까 망설였다. 갈까 말까 망설일 땐 가는 편이 낫다고 누군가 얘기했던 것 같은데. 안 와보면 어쩔 뻔! 그것은 진리였다. 광활하게 펼쳐지는 녹색의 구릉지대를 감상하며 버스로 2시간 20분이 걸려서 도착한 아그리젠토. 아그리젠토 버스 터미널에서 다시 신전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전의 계곡 앞에 당도한다. 지중해를 면한 언덕에는 고대 그리스인이 남긴 아름다운 도리스 양식의 신전들이 흩어져 있는데, 이 지역을 ‘신전의 계곡’이라고 부른다. 34개 중 4개의 기둥만이 남아 있는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원래는 가장 큰 신전이었으나 지금은 돌무더기만 남아 그냥 지나칠 뻔했던 제우스 신전, 한참을 주변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던 가장 오래된 헤라클레스 신전, 가장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콘코르디아 신전과 그 앞에 놓여있어 인증샷 명소가 되어버린 이카로스 청동상, 그리고 단언컨대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되어 선명하게 기억될 헤라 신전. 헤라 신전을 바라보다 등을 돌리면 지중해가 펼쳐진다. 아! 너무도 아름답다. 2월 19일. 기분 좋은 블루빛 하늘,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과 흩날리는 꽃잎이 고색창연한 신전과 푸른 지중해와 함께 우리를 환영하고 있다. 기원전 5~6세기에 건설된 그리스 신전들 속에서 엄마와 나는 2020년의 봄을 만끽하고 있다.

20200219_141647.jpg 아그리젠토 신전의 계곡의 봄꽃



여행의 마지막 날, 팔레르모에서 남서쪽으로 버스를 30분 달려 도착한 도시 몬레알레. 언덕길을 오르며 펼쳐지는 지중해와 팔레르모 전경이 볼 만하다. 몬레알레의 볼거리는 몬레알레 대성당이고, 몬레알레 대성당의 볼거리는 무엇보다 벽과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황금빛 모자이크다. 12~13세기에 걸쳐 제작되었으며 무려 2,200kg의 황금이 사용되었단다. 모자이크는 성경 속 장면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나는 휙 보고 지나가는 것을 엄마는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있다. 엄마는 이 성당에서 찾아봐야 할 성경 내용을 담은 대표적 그림을 공부해 오셨던 거다. 하지만 이 넓고 높은 성당의 벽과 천장에서 어디에 있는지 모를 그 작품들을 찾으려면 꽤 시간도 걸리고 목도 아플 일이다. 그러나, 호기심 많고 탐구력이 뛰어난 엄마는 하나하나 찾아내고 있다. 아담과 이브,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 노아의 방주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 꼭 보고 오리라 마음먹고 있던 그림을 다 찾아내고는 너무 좋아하신다.



몬레알레에서 숙소로 돌아오며 팔레르모 중심가를 어정거리던 우리는 시청 앞 광장에서 펼쳐지는 팔레르모 어린이들의 가장행렬을 보게 된다. 무슨 연유에서 하는 행사인지는 모르겠으나 팔레르모 어린이와 학부모들이 다 나온 듯한 그 행사에 우리도 끼어서 그저 즐겁기만 하다. 팔레르모는 내일이면 떠날 우리에게 뭐라도 더 얹어 주고 싶은 건가 보다.


20200220_163918.jpg 팔레르모 시청앞의 어린이들


드디어 출국일 아침. 숙소 안의 책상 의자에 앉아 있던 엄마에게서 나온 한마디.

“아..!! 난 더 할 수 있는데...”

더 걸을 수 있고, 더 갈 수 있고, 더 볼 수 있고, 더 배울 수 있는데 여기서 멈춰야 하는 것이 너무 아쉽다는 뜻이리라. 그 말을 들은 나는 많이 감사하고 한편 두렵기도 하다. 엄마가 나와의 험한 자유여행을 이렇게 좋아하시니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감사하다. 그러나 또다시 이렇게 여행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마음이 무겁기도 하다.


귀국행 비행기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 옆자리에 앉게 된 외국인 커플이 승무원에게 뭐라 뭐라 얘기를 하더니 다른 자리로 옮긴다. 나를 피하여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왜?!!! 어렴풋이 그 이유를 짐작해 본다. 한국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도착하며 짐작했던 이유가 맞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우리는 국내 코로나 확진자가 15명일 때 떠났었고, 전날의 확진자 204명이 433명으로 늘어나며 코로나 위기로 발칵 뒤집혀진 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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