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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에르떼 Dec 17. 2022

잃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

4학년의 새 학기가 시작되던 날, 설레는 마음으로 교실 뒷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나와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친구는 누가 있을까, 내가 아는 친구는 있을까?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꿈에 그린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참하고 선한 이미지에 예의 바르고 다정했다. 게다가 공부도 잘하고 글씨까지 예쁘게 썼다. 그 친구와 가까워지며 나는 알 수 없는 우월감을 느꼈다.


‘내 친구는 무려 이런 장점을 갖고 있는 친구라고~‘


이 아이와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우리는 교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교환 일기는 그 당시 유행하던 것이었는데 예쁜 공책을 하나 사서 서로 번갈아가며 일기를 쓰는 형식이었다. 그 친구와 나는 교환 일기에 그림도 그리고 편지도 쓰면서 우정을 쌓아갔다. 비밀 이야기도 주고받으니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아 기분 좋았다.


하지만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서운한 것도 점점 생겨났다. 나는 이 친구가 제일 소중하고 친한 친구인데 그 친구는 나 말고도 다른 친구가 많았다. 그들과 가까이 지내는 친구를 보며 내 자리를 빼앗긴 기분도 들고 질투도 났다. 그 친구가 나를 서운하게 할 때마다 나는 그냥 내 감정을 모른 척했다. 서운한 마음이 들어도 그냥 참았다. 내가 느낀 마음을 이야기하면 친구가 실망하고 나를 떠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입을 굳게 다물고 그냥 웃었다. 무조건 그 친구의 말에만 따랐다. 이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다.


학년이 바뀌고 우리는 반이 갈라졌다. 너무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는 나와 달리 그 친구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교환 일기도 여전히 쓰고 있었지만 예전 같지 않았다. 그 친구는 전만큼 정성스럽게 쓰지 않았고 교환 일기를 갖고 있는 시간도 3일에서 일주일, 길게는 2주까지 이어졌다. 참다못한 나는 서운한 마음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큰둥한 친구의 답변은 상처가 되어 내 마음에 꽂혔다. 나도 해바라기 노릇을 그만두기로 했다. 새로운 반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에게 집중하며 예전처럼 그 친구만 바라보지 않았다.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서서히 멀어졌다. 지금은 어디서 뭐하고 사는지 소식조차 모르는 그런 사이로 남았다. 이렇게 흐지부지 끝날 사이였는데 난 왜 그렇게 그 친구를 놓기 싫었을까. 아무래도 난 그 친구에게 흘러가는 빗물보단 마음속에 쌓이는 눈 같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나 보다.


내가 그 친구를 소중히 대하는 만큼 나도 소중히 대해주길 바랐고, 내가 그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 하는 것처럼 그 친구도 같은 마음이길 바랐다. 그런 바람은 내 감정을 참고 모른 척한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다. 서운한 것이 생기면 터놓고 이야기를 해야 했고, 설사 다툼으로 이어지더라도 진지한 대화를 해야만 했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맞추는 관계는 진전이 없다는 걸, 함께 노력하고 발맞춰 나가야 진정한 친구가 된다는 걸 그 친구를 잃고 나서야 깨달았다.


손으로 모래알을 아무리 꽉 움켜잡아도 모래는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간다. 그 친구는 내게 모래 같은 친구였다. 어린 마음에 꿈에 그리던 아이를 만나 영원한 친구로 남고 싶었던 마음이 나와 그 친구를 억죄고 말았다. 적당한 거리와 솔직함이 관계를 이어나가는데 필요하다는 걸 그땐 몰랐다.


소리 없이 쌓이는 눈처럼 상대의 마음에 눈으로 남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은 요란하게 내리는 비처럼, 잠시 스쳐 지나가도 기억할 추억거리가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모두에게 눈 같은 사람으로 남기보다 단 한 명이라도 흘러가는 빗물처럼 빗소리로 나를 추억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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