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와 밥을 먹을 때마다 늘 틀어놓고 보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오빠의 최애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 시즌2이다.
지난 시즌보다 좀 더 예능화가 되어서 재밌게
보고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내 마음속 냉부
레전드화는 시즌 1의 박철민 편이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풍족하게 먹지는 못했지만
어머니의 사랑이 가득 담긴 음식들을 이야기하는
그의 눈빛엔 추억이 가득했다. 셰프들이 재현한
어머니의 음식을 먹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최근에 그 편이 생각나서 다시 봤는데
울고 있는 박철민 배우를 보며 나도 같이 울었다.
그의 감정이 전해지는 것 같아 눈물이 절로 났다.
동감이 아닌 공감의 눈물이었다.
내게도 먹고 싶지만 이제 다신 먹을 수 없는 음식이
있다. 그건 외할머니께서 만들어주신 음식이다.
언젠가 우리 집에 오셨던 외할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호박범벅을 만들어 주셨다.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주방에서 요리를 하시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선명하다.
외할머니는 커다란 늙은 호박을 덥석 들어서 흐르는 물에 씻으시곤 도마에 올려서 굵직한 크기로 썰기
시작하셨다. 손이 얼마나 빠르신지 커다란
늙은 호박은 어느새 소분이 되어 커다란 냄비에서
펄펄 끓고 있었다. 무심하게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툭툭 하시곤 가스레인지 앞에서 눌지 않도록 국자로 한참을 저으셨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생생하다.
눈 깜짝할 새에 뚝딱 완성된 외할머니표 호박범벅은 내 생에 최고의 맛이었다. 적당한 눅진함에 콩까지
넣어서 달달하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
빛깔은 또 얼마나 고운지 눈과 입이 모두 호강하는
음식이었다. 아삭한 김치와 함께 먹으면 두 그릇은
기본으로 비웠다.
호박범벅뿐만 아니라 외할머니께서 해주셨던
각종 나물 반찬, 팥죽, 멸치볶음도 정말 맛있었다.
양념을 계량하지 않고도 환상의 맛을 만들어내는
외할머니는 연금술사 같았다. 그중 가장 별미는
안동식혜였다. 일반 식혜와는 달리 주황빛을 띤
비주얼에 처음에는 먹기가 힘들었다.
땅콩 맛으로 겨우 먹었는데 신기하게 시간이 지나니까 안동식혜의 참맛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외갓집을 나설 때면 굽은 허리로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시며 반찬과 손질한 나물,
그리고 안동식혜를 꼼꼼하게 챙겨주셨던 외할머니는
어느 해 그런 말씀을 하셨다. 이제는 힘들어서
더 이상 식혜를 못하겠다며 올해가 마지막 식혜라고
머쓱하게 웃으셨다. 전부터 부모님께서 손이 많이
가신다고 그만 만드셔라고 했을 때도
손사리 치시며 아직 괜찮다고 말씀하셨던
외할머니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거다.
그쯤부터 외할머니의 기력은 점점 떨어지셨고
더 이상 외할머니의 음식은 먹을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아흔셋의 외할머니는 눈빛은 총명하시지만
거동을 전혀 하지 못하신다. 귀도 많이 어두워져서
전화 통화는 가끔 잘 들릴 때만 소통이 가능하다.
주방에 서서 호박범벅을 젓던 외할머니의 모습은
추억 속으로 잠겼다.
결혼을 한 뒤, 본가에 가서 엄마께서 해주신 음식을
먹을 때면 냉부해의 박철민 편이 떠올랐다.
어릴 땐 당연하게 먹었던 엄마의 음식이 이제는 본가에 가야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간장으로 맛있게 볶은 어묵반찬,
감자를 슬라이스 해서 양념 입혀 구운 양념감자구이,
손수 만든 양념을 얹은 꼬막무침까지…
집에 갈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주시는
엄마의 사랑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엄마는 몇 해전부터 동생한테 받은 키티 수첩에
레시피를 적기 시작하셨다. 어플에서 검색을 한 뒤
후기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마음에 드는 레시피를
수첩에 옮겨 적고 요리를 하셨다.
반듯하게 정자로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레시피는
하나 둘 모여 어느덧 양이 꽤 많아졌다.
가족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먹이고 싶은 엄마의 사랑이 가득한 키티 수첩을 볼 때면 마음이 시큰해진다.
아직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겠지만 언젠간
엄마의 음식도 추억의 음식으로 남겠지?
그때 키티 수첩을 보면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다.
자식들에게 헌신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외할머니를
쏙 빼닮은 우리 엄마. 나와 동생이 오면 슈퍼우먼처럼 하루 종일 주방에서 몇 시간이고 서서 여러 개의 음식을 뚝딱 만들어내는 우리 엄마.
엄마가 해주신 음식에는 어릴 적 먹던 음식의 향수와 엄마의 사랑이 가득해서 소중하고 그래서 더 맛있다.
이제는 내가 엄마에게 맛있는 음식을 많이 해드리고 싶다. 나는 엄마처럼 레시피를 적지 않고 캡처만 해두고 있는데 이 레시피를 연습해서 엄마에게 다양한
음식을 해드리고 싶다. 엄마께 받은 따뜻한 사랑을
더 큰 사랑으로 보답해 드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