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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w Oct 30. 2022

비바람이 지난 자리에 꽃이 핀다

최저시급 인턴이 매니저가 되어 6명의 팀을 꾸리기까지




입사 1년 후 갑작스러운 팀 이동, 어쩌면 다가올 서막의 복선이었을지도.


스물아홉 미국에서 두 번째 인턴을 시작했을 때 나의 포지션은 Production(프로덕션)이었다. 원단 소싱부터 수십 번의 디자인과 샘플 수정 과정을 거쳐 하나의 완성된 옷이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는지 그때 배웠다. 그렇게 1년간 프로덕션 업무를 배워나가며 한창 손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당시 회사는 몇 년 사이에 급속도로 성장하며 매출 또한 고공행진 중이었다. 한 스타일 당 1만 장 가까이 되는 수량이 눈 깜짝할 사이 팔려나갔고 매일 바이어의 리오더 요청이 쇄도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재고와 매출 관리, 판매 전략 수립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고 이를 담당하는 Merchandising(머천다이징) 팀의 인원 충원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당시 머천다이징 팀 매니저이셨던 분께서 감사하게도 나를 좋게 봐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내가 머천다이징 팀으로 이동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회사에 내비치셨다. 내가 한국에서 온라인 MD로 일하며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점 또한 한몫했다. 그렇게 입사 후 1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프로덕션 팀에서 머천다이징 팀으로 부서이동을 하게 되었다.


머천다이징 팀은 회사 자체 스토어와 긴밀히 커뮤니케이션하여 반응이 좋은 상품을 재빨리 파악하고 프로덕션, 디자인팀과 협의해 리오더가 진행될 수 있도록 어레인지 했다. 또한 반응이 좋지 않거나 과다재고인 상품은 효율적인 재고 소진을 위해 바이어에게 최대한 좋은 가격에 판매될 수 있도록 세일즈팀과 커뮤니케이션했다. 즉, 머천다이징 팀은 디자인, 프로덕션, 세일즈, 스토어까지 회사의 전 부서를 아우르며 긴밀히 협력해 아웃풋을 내는, 사실상 회사에서 '실세'에 가까운 팀이었다. 그러다 보니 늘 일이 많고 야근도 잦았다. 내 매니저는 일에 대한 엄청난 열정과 책임감을 지닌 멋진 분이셨다. 그런 매니저를 따라 나 또한 자연스레 담당하는 일의 양과 책임의 범위가 점점 늘어났다. 하루에 2-3건의 바이어 미팅이 잡힐 때도 다반사였고 바이어 일정에 맞추다 보면 점심을 거르는 일도 수두룩 했다. 때론 5시 퇴근시간이 다되어 그제야 겨우 숨을 돌리며 저녁인지 점심인지 모를 첫 끼니를 먹은 적도 꽤 있었다.

솔직히 한국에서 신입으로 입사해 2년 3개월 간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일이 많다며 불평불만한 적도 많았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일하며 비로소 깨달았다. 그때가 호시절이었다는 것을. 당시엔 한국에서의 생활이 너무나도 답답하고 버거워 버티기가 힘에 부쳤다. 그래서 어쩌면 미국에 오기 전 무의식적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으리라. 그런데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랄까. 미국에서의 회사생활은 매일이 더 큰 도전의 연속이었다. 운명은 보란 듯이 나의 인내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장난을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일했던 곳은 Bulk Production(대량생산)을 기반으로 한 Wholesales 회사였기 때문에 시즌 트렌드를 반영한 최대한 많은 가짓수의 스타일을 대량으로 생산해 경쟁사보다 저렴한 가격에 판매했다. 한 달에 입고되는 스타일 수만 200가지가 넘었다. 매년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였던 만큼 회사 내의 모든 의사결정은 신속히 이루어졌고 두더지 게임처럼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터질지 예측할 수 없었다. 의자 뒤로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매일 긴장 상태로 일을 했다. '적당히'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시지프스의 삶처럼 끝이 없이 업무가 쏟아졌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처음엔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엄청난 양의 일과 빠르게 진행되는 업무 속도에 점차 익숙해져 갔다. 그리곤 어느 순간, 나는 수천 가지의 제품들 중, 샘플만 봐도 스타일 넘버(제품 고유 번호)가 자동반사적으로 입에서 튀어나오는 경지에 이르렀다. 매일이 몰아치는 태풍의 연속 같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휘몰아치는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일을 쳐내며 좀 더 효율적으로 일하는 방법을 터득해나갔다. 만약 당시의 나를 게임 속 캐릭터에 비유한다면, 장애물과 적을 만나 싸우고 문제를 해결해나가며 나도 모르는 사이 엄청난 레벨업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Covid-19이 가져온 예기치 못한 변수, 서른한 살 매니저가 되다

2020년 7월, 머천다이징 팀에서 일한 지 1년 3개월 정도가 지났을 즈음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캘리포니아의 Lockdown 명령이 해지된 후 사람들이 회사로 복귀한 지 두 달이 채 안되었을 때였다. (*2020년 3월부터 5월까지, 코로나 확산세로 인해 캘리포니아는 약 두 달간 Lockdown 되었고 "Stay at Home" 명령이 시행되었다. 이로 인해 이 기간 동안 필수 업종을 제외한 대부분의 미국의 회사가 문을 닫게 되어 나는 출근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복귀했지만 미국은 여전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것이 불안하고 어수선했다. 물론 회사도 예외는 없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 근무 중이던 한국 인턴들의 상당수가 인턴십 기간을 남겨둔 채 한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바이어들은 코로나로 매출에 직격탄을 맞게 되자 오더를 취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회사도 직원도 모두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왜 항상 일이 풀리지 않거나 힘든 시기엔 안 좋은 일은 꼭 연속으로 겹쳐서 오는 것일까.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나의 매니저가 개인 사정으로 인해 갑작스레 회사를 그만두게 된 것이었다. 그동안 나는 그분께 업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있었기에 충격이 매우 컸다. 회사 밖에서는 사적으로 종종 밥도 함께 먹고 때론 술잔도 기울이며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였다. 퇴사라는 선택이 그분에게는 더 행복한 삶을 위한 신중한 결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그분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업무적으로 앞으로 혼자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그렇게 스물아홉에 최저시급 인턴으로 입사한 나는 2년 후인 서른한 살, 회사에서 가장 일이 많기로 소문난 부서의 매니저가 되었다. 참 사람일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팀원에서 갑작스레 매니저가 된 직후 심적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코로나 상황과 겹쳐 회사 사정이 좋지 않은 시기였기에 감히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바이어들이 줄줄이 캔슬한 오더로 인해 재고처리 문제가 위급해졌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로 인한 컨테이너 입고 지연이 심각했는데 트렌드와 시즌이 중요한 패션 회사에서 이 같은 상황은 매출에 치명적이었다. 선박 운임 비용도 미친 듯이 치솟으며 생산 공장과의 수금 문제, 회사 매출과 손익에도 발동이 걸렸다. 이런 상황에 회사엔 일할 사람마저 없었다. 우리 팀을 포함한 대다수의 한국인 인턴이 미국에서 코로나가 심해지자 이미 한국으로 돌아간 상황이었고 코로나로 인해 실업자와 휴직자가 증가하며 인력난까지 겹쳤다. 출근할 때마다 매일 아침 새로운 확진자 수가 업데이트되었다. 더군다나 내가 막 팀 매니저가 되었을 당시, 우리 팀에는 나를 제외한 두 명의 팀원이 있었는데 둘 모두 머천다이징 팀에 급히 투입된 지 두 달이 채 안된 팀원들이었다. 그 말인즉슨 일을 처음부터 가르쳐 새로이 팀을 꾸려나가야 함을 의미했다. 하지만 회사는 회사이다. 어찌 됐든 상황은 상황이고 적어도 앞으로 머천다이징 팀에 관해 발생하는 그 모든 일의 책임은 매니저인 내게 있음을 의미했다.



매니저와 사원의 온도 차이

대학생 때 자잘한 인턴 경력을 제외하고 한국에서 약 2년 3개월, 그리고 미국에서 약 2년 3개월의 회사생활 경력이 있었지만 이 같은 상황에 생애 첫 매니저가 된 나는 그때부터 모든 것을 알아서 해나가야 했다. 더 이상 나를 지켜줄 든든한 사수는 없었다. 팀원일 때와 매니저일 때는 업무를 대하는 자세, 팀과 회사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팀원일 때는 그저 나에게 주어진 일을 다하면 그만이었지만 매니저는 그렇지 않았다. 설령 내가 직접적으로 잘못하지 않았더라도 팀원이 잘못한 일로 인해 사고가 생기면 그것 또한 매니저인 나의 책임이기 때문이었다. 책임감의 깊이와 업무를 대하는 결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팀원이었을 때는 절대 보이지 않던 것들이 희한하게 매니저가 되자 조금씩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가령, 말하지 않아도 팀원들이 지금 어떤 생각으로 일을 하고 있는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보였다. 팀원에게 사적인 고민이 있거나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도 그 분위기와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팀원들끼리 미묘한 갈등 상황이 있을 땐 원만히 해결되도록 매니저인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손을 써야 했다. 각자가 맡은 일을 책임감 있게 제대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회사의 모든 부서와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우리 팀은 소통과 팀워크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렇기에 팀원 한 명 한 명에게 세심히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을 챙기는 일 또한 매니저로서 꼭 필요한 역할이었다. 시간은 늘 한정되어 있고 일은 넘쳐나는 우리 팀이었기에 그때부터 나를 포함해 어떻게 하면 팀원들이 최고의 역량을 발휘해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을지 늘 고민했던 것 같다. 때에 맞는 적절한 당근과 채찍으로 팀의 에너지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애를 썼다. 빠듯한 월급이었지만 때론 사비로 퇴근 후 팀원들과 밥을 먹으며 회사에서 말 못 했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며 풀었다. 

전 매니저가 워낙 일을 잘하셨고 팀원들을 잘 챙기셨던 분이었기에 팀과 회사에 누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책임감의 무게가 더욱 컸던 것 같다. 그렇게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매니저가 된 나는 시행착오를 겪어 나가며 나만의 방법으로 조금씩 팀을 꾸려나갔다. 



일은 가장 많지만 분위기는 제일 좋은 팀이 되기까지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아직도 배울게 너무나도 많고 많이 부족한 사람인 걸 스스로 알고 있었다. 경력도, 경험도 모두 부족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미치도록 의지하고 싶었다. 어쩔 땐 나에게 닥친 상황들이 너무 버겁고 힘들어 모두 내려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코로나 팬데믹, 어려운 회사 상황, 인력 부족 등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팀원들은 최선을 다해 나를 따라와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정말 몸이 아파도 마음대로 아플 수 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팀원들끼리 '우리 팀에서는 아픈 것도 죄야.'라는 말을 농담 삼아하며 씁쓸히 웃어넘기곤 했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팀원들 앞에서는 절대 티 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매니저로서 웃으며 그들을 독려해야 했다. 그때의 상황은 내 힘으로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도망칠 곳도, 피할 수도 없었다. 회사에서 영주권을 진행하고 있었기에 영주권을 포기하고 한국에 가거나 회사를 그만둘게 아니라면 어차피 버티며 겪어나가야 할 상황이었다. 나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내뱉은 말은 무의식 중에 나의 생각이 되고 그 생각은 곧 행동이 된다. 그때는 입을 열면 나도 모르게 부정적인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이때부터 입을 닫고 최대한 말을 조심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저 묵묵히 버티며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었다. 매일 출근하기 위해 집 밖을 나설 때마다 마음에 수백 번 새겼다.


'오늘도 잘 버티자.'

'이왕 해야 한다면 즐겁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그렇게 버티는 동안 시간은 거북이처럼 느리지만 조금씩 흘러갔다. 점차 미국에 백신이 안정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백신을 맞으며 코로나 상황도 조금씩 안정화되는 듯했다. 팀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팀원들도 몇 달이 지나면서 서로 손발을 맞춰 나갔고 우리 팀은 점차 안정을 찾아 나갔다. 어느새 우리 팀은 회사에서 '일은 많지만 팀워크가 가장 좋고 분위기 좋은 팀'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영원히 지날 것 같지 않던 어둠의 터널 끝에 조금씩 희미한 빛의 줄기가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약 1년 여가 흐른 후, 어느새 눈을 떠보니 나는 나를 포함한 6명의 팀을 이끄는 매니저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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