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ew Oct 30. 2022

애증의 작고 네모난 초록색 카드

영주권을 얻기 위한 3년간의 인고의 시간



애증의 영주권을 따기 위한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30년 같았던 3년

사실 나는 감사하게도 운이 좋은 케이스이다. 미국에 와서 첫 회사에서 바로 영주권 스폰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회사의 규모도 큰 편이었고 이전에 이 회사에서 영주권을 받은 분들의 선례도 있었던 회사였다. 처음에 회사에서 영주권 스폰 제안을 받았을 때는 그저 기쁨으로 가득했다. 동시에 그것은 앞으로 중간에 절대 내릴 수 없는 배에 본격적으로 올라탔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영주권 진행을 시작하게 되면 영주권을 받기 전까지 수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비용도 비용이지만 제출할 서류의 종류도 엄청나게 많다. 처음 영주권 진행 시작 전 변호사가 각 진행 단계 별 대략적인 타임라인을 미리 안내해준다. 나 같은 경우 영주권 진행을 시작할 당시에는 '어떻게든 잘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단계 별 타임라인에서 몇 개월 지연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애태우고 맘 졸이며 기다린다고 해서 더 빨리 진행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영주권을 진행하는 도중 '코로나 팬더믹'이라는 엄청난 변수가 생긴 것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된 이후 미국 이민국 업무는 중단에 가깝게 무기한 지연되었다. 영주권 인터뷰를 포함한 대면으로 진행되는 영주권 진행 업무는 올스톱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영주권을 진행하는 도중 영주권 문호가 닫혀 수개월을 진행 없이 그저 기다려야만 했다. 영주권 문호란 간단히 말해, 영주권 발행은 무한정 가능한 것이 아니라 카테고리 별로 할당량이 정해져 있는데 회계연도 안에 해당 영주권 쿼터가 소진될 시 문호가 닫히게 된다. 영주권 문호가 닫히면 영주권 진행 업무(심사, 승인, 발급)가 전면 중단되기 때문에 다음 회계연도가 시작될 때까지 그냥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코로나 팬데믹과 영주권 문호라는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변수로 인해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잘 될 거야.'라며 애써 현실을 긍정하려 했지만 나도 연약한 사람인지라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다. 최대한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려 해도 자꾸만 '혹시나' 하는 생각과 불안이 문득문득 나를 찾아왔다. 수시로 미국 이민국 앱에 접속해 나의 영주권 진행 상태가 업데이트되었는지 체크했고, 결국 뾰족한 답변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1%의 희망을 품은 채 변호사에게 메일 발송 버튼을 누르기도 했다.


이렇게 내 마음이 자꾸만 초조해지게 된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2020년 코로나가 한창일 당시, 회사에서 나는 갑작스레 매니저가 되어 팀을 꾸려나가며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 영주권 진행 지연은 나를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회사와 영주권. 그 어떤 것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것들이 내 숨구멍을 틀어막고 놓아주지 않아 피를 말리는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회사에서 스폰을 받아 취업영주권을 진행한 경우였기에 이직과 퇴사에서도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 영주권 진행 도중에 회사를 옮길 '수'는 있지만 그만큼 과정과 비용이 추가되기 때문에 대부분은 회사를 옮기지 않고 영주권이 나올 때까지 참고 버티며 인내한다. 영주권을 진행하는 3년 동안 '선택권' 즉, '자유'가 없다는 것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요구사항이 있어도, 또는 부당한 상황에서도 평소같이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워진다.

작고 네모난 그린카드, 영주권이 지금 겪고 있는 시간과 고통을 맞바꿀 만큼 가치가 있는지 회의가 들 때도 있었다. 애타는 마음에 변호사에게 물어봐도 안타깝지만 변호사 입장에서도 기다리라는 말 밖에 할 수가 없다. 영주권은 그냥, 그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지독한 짝사랑 같았다. 차라리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영주권이 확실하게 나온다는 확신 혹은 확답이 있다면 버틸 수 있으련만 영주권은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항상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극단적으로 10년 가까이 기다려도 영주권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영주권은 누구에는 빠져나올 수 없는 희망고문이 될 수도 있다. 가족과 친구가 보고 싶어도 영주권을 진행하는 동안에는 한국에도 나갈 수 없었다.



기도, 운동,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가짐과 생각의 변화

그럼에도 영주권은 나에게 소중했다. 스물아홉, 미국에 다시 온 뒤 나에게 영주권을 따는 것은 1차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 살기 위해서 영주권은 반드시 거쳐야 할 첫 관문이었다. 힘들었지만 결국은 잘될 것이라는, 반드시 영주권을 손에 얻고야 말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렇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져버릴 것 같은 마음을 붙잡고 견디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매일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기다림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자꾸만 침전하는 스스로에게 처방과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을 하며 미친 듯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혼자 속앓이 했던 마음, 내면에 쌓여있던 부정적 감정의 티끌이 모두 땀에 녹아내렸다. 사실 그전까지 운동은 내 평생 항상 꾸준히 하지 못하는,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영역이었다. 늘 하다가 말곤 했었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과 무기한 지연된 영주권 진행 상황 속에 운동은 유일하게 내 정신줄을 잡아주었고 매일 나를 버티도록 해주었다. 주 4일 이상 쫓기듯 땀을 흘리며 꾸준히 운동하는 습관이 완전히 몸에 배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이 시간을 지나며 변한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내 생각이, 내 행동이, 내 가치관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예전엔 내가 가진 것에 대해, 내가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 내심 당연하게 여겼었다.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있었던 일들을 찬찬히 반추해보니 그동안 내게 고마운 인연과 감사한 일들이 참 많았다. 한 발짝 떨어져서 생각해보니 나는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 미국에 와서 이렇게 빠른 시간에 영주권 진행을 시작할 수 있는 건 대단한 일이야. 내게 주어진 것에 더욱 감사하자.'

'내가 지금 힘들다는 것은 머지않아 곧 좋은 일이 생긴다는 의미일 거야.'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보기보다는 내게 주어진 것들에 더욱 집중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긍정과 희망의 한줄기 끈을 잡고 버티고 버텼다. 이후 수개월 간의 긴 기다림 끝 영주권 문호가 다시 열리고 미국 이민국 업무가 재개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또한, 백신 보급으로 극악으로 치닫았던 코로나 상황이 조금씩 완화되며 그간 밀려있었던 영주권 진행 체증에 조금씩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더디지만 영주권 업무는 다시 진행되었고 미국에 온 지 3년 뒤인 2021년 4월, 드디어 나는 영주권 카드를 손에 얻게 되었다.  작고 네모난 카드가 내게 주는 의미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남들이 보기엔 대단할 것 없는 그저 작은 초록색 카드일 수 있지만 그것은 지난 3년 간 나의 미국 생활을 모두 함축한 결정체였다. 스물아홉 미국에 와서 적응하며 속앓이 했던 시간, 회사에서 주어진 과도한 책임과 일들에 삭히며 버텼던 시간, 그동안 인내한 것에 대한 보상, 기쁨, 감사 그 모든 것이 녹아져 있었다. 동시에 이제야 두 다리 뻗고 편히 잘 수 있다는 안도, 이직과 퇴사의 선택권이 생겼다는 자유, 드디어 한국에 갈 수 있다는 행복, 신분 걱정 없이 합법적으로 미국에서 살 수 있는 보장을 의미했다. 영주권을 받고 사실 일상에서 크게 달라진 점은 없지만 가장 좋은 점은 뭐니 뭐니 해도 '마음이 편해졌다는 것'이었다. 영주권을 진행하는 동안에는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도 늘 마음 한구석엔 해결되지 않은 응어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어찌 보면 나는 미국에 와서 영주권을 빠른 시간 안에 얻은 편에 속했다. 이 작은 초록색 카드를 위해 10년 넘게 마음고생하며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마다 제각각 사연이 다르기에 그 기간이 짧든 길든 함부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기간과 상관없이 이 작은 네모 속에는 고민과 좌절, 눈물과 인내가 모두 담겨있다.


그렇게 나는 미국에 온 지 3년 만에 1차 목표였던 영주권을 따는 데에 성공했다. '신분'의 서러움에 울고 웃던 지난날을 뒤로한 채 합법적으로, 당당하게 미국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이전 07화 신분 때문에 울고 웃는 미국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