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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창인 Jun 01. 2020

87. 코로나 시대의 사랑

1.

  우리는 그제야 알았다 우리들이 얼마나 비가역적으로 묶여있는지 그것을 깨닫게 해준 건 어느 광장의 함성도 공분을 자아낸 스캔들도 무시무시한 전쟁도 아니었다 불현듯 문을 두드린 병마에 우리들은 발가벗겨졌다


2.

  우리는 우리들로부터 구별되는 특별한 실이라도 있는 양 굴었다 하지만 이제는 지구가 커다란 실타래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희미해진 한 올의 뜻을 알아내야 한다 우리들에게 한 줌 칼자루가 쥐어졌다 그래서 우리들은 등을 돌려 실가닥을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무한한 발산의 연결망이다 우리는 수렴을 두려워하며 욕망한다 두려운 욕망을 한다


3.

  나는 이제 너를 죽일 수 있고 너도 나를 죽일 수 있다 삶의 그늘에 가려 도무지 보이지 않던 가능성은 어느새 우리의 반려견이 되었다 작열하는 태양이 지고 세계가 다시 응달이 되어도 우리는 반려견을 데리고 살아야 한다 서로에게 유해한 존재로 태어나 서로에게 무해하기를 바란다 


4.

  나는 타협한다 이제 나는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웃긴 마음이다 너를 죽여도 좋겠다고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욕망은 일방통행이다 다만 반대편에도 나를 향한 일방통행의 욕망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의 한 올은 다른 것과 색이 다르다거나 유난히 굵은 게 아니다 그저 서로를 품을 만큼 느슨한 장력이다


5.

  비로소 우리는 행복한 출혈을 한다 또는 반역처럼 보이는 순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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