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 C, D 네 사람이 카페에 앉아있다. 각자의 자리 앞에 취향껏 고른 커피가 놓여 있다. 자리에 앉은 지 시간이 많이 흘러 잔에서 더 이상 김이 나지 않는다. 카페는 조명이 어두워 서로의 얼굴이 겨우 보인다. 창이 없는 지하의 카페다. 넷은 이야기를 오래 나눈 탓에 슬슬 할 말을 잃어간다.
A: 진부한 딜레마 얘기나 해볼까요, 심심한데.
B: (아무래도 좋다는 투로) 뭐 그러죠.
C, D도 대답은 없지만 동의하는 듯 A를 바라본다.
A: 전쟁이 났다고 가정해봅시다. 두 명이 한 집에 고립된 거죠. 식량은 제한되어 있고. 그런데 한 명은 말랐고 한 명은 뚱뚱합니다.
C: (말을 자르며) 어떻게 식량을 분배해야 하냐 이거죠.
A: 네, 그렇죠. 몸집에 맞게 차등 분배하거나. 정확히 반반 나누거나. 어떻게 생각하세요.
D: 글쎄요, 조금 애매하게 느껴지네요. (잠시 고민하다) 제가 누구인지를 모르니까요.
B: 뚱뚱한 사람은 후자, 마른 사람은 전자. 결국 이런 논리가 된다는 말씀이시죠.
C: (살짝 미소를 지으며) 뭐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지만, 그런 식이라면 이 딜레마는 가치가 없으니까요.
D: (악의 없이, 정말 호기심으로) 그럼 어떻게 하면 여기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나요?
A: 상황적인 것은 그저 상황일 뿐이지요. 논리를 따져보자는 겁니다. 말하자면, 완벽한 외부자의 시선에서 둘에게 공정한 식량 분배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D: (곰곰이 생각하다가) 하지만 그런 논의야말로 저에게 전혀 와 닿는 것이 없네요. 전쟁 아래서 식량 분배를 하는 주체는 결코 외부자일 수 없으니까요. 둘 중 한 사람이든, 한 가족의 가장이든, 식량 배급을 맡은 정부 관료든. 그 역시 식량 분배를 받는 대상일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공정한 분배 같은 건 기대하기 힘들 겁니다. 전쟁은 모두를 내부자로 만드는 재앙이며, 그 재앙을 저울대에 올려두고 논리를 따지는 것은 너무 많은 상상력을 요하는 일인 듯합니다.
B: 저도 D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딜레마는 삶을 교란시켜 그 진상을 알기 어렵게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삶을 벗어난 딜레마는 그 순간 교란하는 힘을 잃고 맙니다. 딜레마의 존재 자체가 또 하나의 딜레마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그 교란을 억지로 풀기 위해 삶을 이탈하여 궁리할 것이 아니라, 오직 딜레마가 어떤 불행을 함축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딜레마는 말하자면 불행인 셈입니다.
C: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썹을 약간 찌푸린다) 흠, 좋아요. 그것도 재밌는 관점이네요. 식량 분배 딜레마가 담는 근본적인 불행은 무엇인가…….
A: 두 배고픔의 차이를 명확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 배고픔을 수량화할 수만 있다면, 정확한 비가 계산될 것이고 그에 따라 식량 분배를 하면 되겠죠. 그러나 그런 계산은 불가능하고, 가시적인 몸집에 따라 대충 어림할 뿐입니다. 몸무게와 식성의 그 미묘한 괴리, 거기서 모든 것이 출발하지 않을까요.
B: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시작점을 앞당길 수 있겠네요. 인간의 배고픔이 다르다는 것. 모두가 똑같이 배고프다면 차등 분배를 고민할 일도 없었을 겁니다.
D: 아아,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해요. 이 딜레마에서 가장 근본적인 불행은 전쟁, 아닐까요. 배고픔의 차이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이라면, 그 속성이 인간을 잔인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전쟁이니까요.
C: 예리하시네요. 하지만 전쟁이 아니라도 우리는 필연적으로 식량 분배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매일매일이 더 많은 식량을 위한 전쟁이죠. 왜 우리는 식량 분배를 멈출 수 없는가. 인간은 늘 배고프기 때문입니다. 이 딜레마에서 가장 근본적인 불행은 배고픔입니다. 말씀해주신 어쩔 수 없는 인간다움, 탯줄로부터 부여받은 그 배고픔이 우리 삶을 곱절로 더 어렵게 만든 것입니다.
B: 이미 진 게임, 이라는 말씀이신가요.
C: 삶은, 확실히 패배감이 드는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게임을 하는 상대가 없으니 절대 질 일은 없는 것이죠.
갑자기 D가 쿡쿡 웃는다.
C: (눈썹을 더 찌푸리며) 제 이야기가 그렇게 재밌습니까?
D: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아, 아닙니다. 단지 제가 근본적으로 불행해지기 시작해서요.
A: (시계를 보더니 멋쩍은 얼굴을 한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저도 슬슬 배고파지던 참입니다. 이만 일어날까요?
C: (자리에서 일어나며) 예, 그럽시다. 적어도 오늘 저녁은 저희 모두가 배부를 정도의 여유가 있으니까요.
넷은 모두 일어나 카페를 떠난다. 반쯤 남은 커피들은 아예 차게 식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