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나를 적으로 삼는 사람이 있었을지 몰라도, 내가 적으로 삼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적을 둘 필요가 없는 것은 특권이다. 여태껏 그 특권을 기만적으로 의식하며 잘 살아왔다.
지금 내가 떠올리는 그분은 한때 내가 가장 의지했던 사람이다. 현장에서 실수를 했을 때 괜찮다는 말을 건네준 첫 번째 사람이다. 언제나 밝은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에너지를 나에게 아무렇게나 뱉어내도 웃어넘기고 말았다.
그것이 밉게 보일 때쯤 나는 습관처럼 나에게서 이유를 찾고 있었다. 군기가 빠져서. 충분히 강하지 못해서. 너무 예민해져서. 하지만 나에게 잘 대해줬는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을까. 얘기해 봐야겠다. 그리고 그분은 장난이었다고 한다.
미움을 미움으로 인정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가. 나는 너무 많이 돌아갔다. 이제 나는 나의 적을 안다. 당분간 나는 자기반성하는 글을 쓰지 않는다.
쌍놈의 새끼야. 쌍놈의 새끼야. 나도 한 번 따라해 본다.
과
이곳에서는 새로운 어른들을 많이 만난다. 그러나 대학이 화제가 되는 순간 어른들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질문은 수순이 정해져 있고 나는 매크로처럼 답을 꺼낸다.
어느 대학 나완? 서울대 나왔습니다. (감탄한다) 무슨 과? 언론 쪽입니다. 나중에 기자할켜? PD 되고 싶어서 들어갔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기? 그럼 모해멍 살켜? 요즘은 코딩 쪽 관심 있습니다. 코딩? 그거이 컴퓨터로 하는 거 아닌? 예 맞습니다. 그러멍 컴퓨터학과 가야 할 거 아닌가? 예, 그런데 저희 과가 언론정보(정보에 강세를 준다)학과여서, 코딩 관련 수업도 있습니다. 복수전공도 생각 중입니다. 아, 기구나.
그러고 나서 보통은 경쟁 사회의 치열함과 공무원 사회의 이점을 열심히 설명하신다.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듣는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듣는다. 우리의 얼굴을 반쯤 가릴 수 있는 이 좋은 시대에도, 나는 마스크 뒤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듣는다.
흑
눈물이 많아졌다. 나의 아픔 때문은 아니다. 아이들 나오는 영화를 보면 눈물을 흘린다. 따뜻한 말을 들으면 눈물을 흘린다. 가끔은 담배를 피우다가도 눈물을 흘린다. 아니, 나의 아픔 때문이었나?
스스로 물러졌다고 생각한다. 물러지는 것이 싫고 물러지는 것이 좋다. 전자는 관성이고 후자는 콤플렉스다. 아프긴 한데 아프다고 말할 줄 몰랐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아프지 않아야 하는 어린이였다.
눈물을 흘릴 줄 안다는 건 그래서 제법 뿌듯한 자랑거리다. 이런 자랑에 친구들은 웃는다. 나 이제 엔프피라고, 하면 네가 무슨 에프냐고, 의 웃음과 같은 맥락이다. 자랑거리가 놀림거리가 되는 느낌이 좋다. 아무도 모르게 변신 중이다. 나 역시 누군가 변신 중인 걸 한참을 모를 테고. 나는 여전히 혼자 있을 때 흑흑대겠지만 동시에 누구는 웃음을 배우고 누구는 사랑을 배운다. 그래서 술잔에 담긴 건 달라도 건배는 외쳤던 게 아닌가, 그날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