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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창인 Sep 02. 2021

97. 아이폰 이야기

iPhone 8 Plus 64GB (2017.12 - 2021.08)

0.

  하필 그날 의자에 앉고 싶었던 게 문제다. 하필 garçon의 발음이 그 순간 궁금했던 게 문제다. 하필 허리를 푹 숙이고 사전 앱을 켰던 게 문제다. 하필 내 발치에 멀티탭이 있었던 게 문제다. 하필 홈버튼이 멀티탭의 모서리 쪽으로 떨어진 게 문제다. 문제도 참 많았던 2021년 8월 20일, 나의 이십 대를 함께해 온 아이폰이 수명을 다했다.


0.5.

  수명을 다했다는 건 실은 과장이다. 나의 아이폰은 여전히 잘 돌아간다. 지금 이 글도 ‘그’ 아이폰으로 쓰는 중이다. 다만 홈버튼이 박살났을 뿐이다. 그러나 홈버튼이 있던 시절의 아이폰은 홈버튼 없이 살 수 있는가? 애플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홈버튼 기능을 디스플레이 내에 구현하는 ‘Assistive Touch’를 제공하지만, 이건 그저 호흡기를 달고 연명하는 꼴이다.

  문제가 그뿐이었다면 연명이라는 선택지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 그런대로 버티며 써야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정말 잠깐이었다, 그러니까 홈버튼이 미친 듯이 발열하기 전까지. 그것은 일종의 신호였다. 인지하지도 못한 채 함께 보냈던 4년 가까운 시간, 그 비정상적으로 길었던 시간을 감각하게 하는 신호였다.


1.

  이 이야기를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우리에게 반듯한 체계의 역사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이유는 차치하고, 정직하게 ‘시작’부터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겠다. 2년 가까이 2g폰으로 수험생 생활을 견뎌내고, 수능이 끝난 겨울 부모님과 동네 핸드폰 대리점에 갔을 때. 나는 아이폰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었다. 쓰기는 어렵지만 왠지 멋있는. 트렌디한 대학생이 되기 위한 필수 아이템. 그 시점의 나는 (적어도) 하나의 울타리에서 해방된 셈이었고 그것을 자축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는 상징이 필요했다.

  물론 그때의 내가 이런 필요를 의식해서 아이폰을 샀다는 것은 헛소리다. 다만 이제 보니 나는 그런 사람이다. 뒷머리를 기른 것도, 제주도에서 군복무를 하기로 선택한 것도. 어쩌면 영화를 하고 싶은 것도. 어쩌면 영화를 하고 싶은 것도, 아이폰을 사는 일만큼이나 간단할지도 모른다. 나의 마음은 이미 다 옮겨갔는데, 그저 상징이 필요한 걸지도.


2.

  그리고 이 이야기는 곧바로 지금 여기로 돌아온다. 차치했던 이유를 들어볼 시간이다. 아이폰과 함께 했던 시간에 대한 서사가 나에게 없다.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오직 시작과 끝만이 있을 뿐이다. 미약한 시작과 창대한 끝만이 있을 뿐이다. 그 시작조차도 끝이 났기 때문에 떠오른 거니까.


3.

  유난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어째서 아이폰의 죽음까지 애도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미 슬퍼할 게 많은데. 그러나 아이폰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동반자가 아니었는가. 일어나서 가장 먼저 눈을 맞추고, 내 머리맡에서 함께 잠드는. 지난 4년간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아이폰이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정말로 일종의 상실감을 느꼈다. 스스로도 그 상실감에 어색해하면서.

  아직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첫째, 고장 난 시점에 대하여. 이러나저러나 4년이나 썼으면 슬슬 기기를 바꿔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전 기기는? 헐값을 받고서라도 팔아야겠지. 그런데 하필 그 시점에 아이폰이 떡하니 고장 나 버린 것이다, 가장 선명한 상처를 남긴 채. 팔지 말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나는 꼼짝없이 이 아이폰을 데리고 살아야 한다.

  둘째, 이게 결정적이다. 발열에 대하여. 보통 발열 이슈가 있다고 하면 핸드폰을 사용할 때 발열이 생기고 사용하지 않을 때 차게 식는 식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그 반대였다. 사용하지 않을 때 홈버튼을 만지면 터질 것처럼 뜨겁다가도, 조금 사용하고 나면 금세 멀쩡하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하나의 메시지밖에 떠올릴 수가 없다. 아이폰이 말한다, 나를 계속 써달라고. 버리지 말라고. 그러지 않고서야 이 기묘한 발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4.

  아직도 유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얼마 전에 일어났던 집단 유난 현상을 소개한다. 최근 어도비 플래시가 서비스를 종료하면서, 추억의 플래시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이 우리 곁을 떠나게 되었다. 이를 슬퍼한 사람들이 급기야는 인스타그램 계정까지 만들어 가며(@ripflash_net)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 나의 어린 시절을 책임졌던 후레쉬맨, 슈, 감자도리가 이제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정말 이상한 상실감이다. 어쨌든 나만 이상한 건 아니다. 사람들은 이제 기술을 애도한다.


4.5.

  이 글이 플래시 장례식에 크게 빚지고 있으므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플래시 장례식에서 애도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플래시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에 의존하여 태어난 수많은 컨텐츠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채널보다 메시지를 오래 기억한다. 오래 기억되는 것이 오래 산다. 2018년부터 시작된 '플래시포인트'는 곧 소멸될 플래시 게임과 애니메이션을 보존하기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다. 플래시는 죽었지만 플래시 컨텐츠는 죽지 않는다.

  가령 카카오가 이모티콘 사업에 열중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언젠가 카카오톡이 다른 혁신적인 기술로 대체가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카톡을 보내지 못한다는 것보다 라이언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에 더 슬퍼할 것이다. 기술 본연의 목적은 언제든 더 나은 기술로 대체될 수 있지만, 그것이 만들어 낸 컨텐츠는 대체될 수 없는 하나의 기억이 된다.


5.

  그런데 지금 내가 느끼는 상실감은 그런 식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아이폰으로 보았던 영화들, 주고받았던 연락들, 즐겼던 게임들? 그런 것들은 아직 내 손안에 있다(아이폰의 마이그레이션 기능은 최고다). 기술과 컨텐츠가 완전히 죽어버리기에 아직 iOS는 견고하다.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나는 아이폰 그 자체를 잃어버린 것이다. 아이폰 8 Plus는 죽었다. 더 이상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다. iOS는 견고하지만, 각각의 아이폰 모델은 수명이 짧다. 나는 아이폰 8 Plus의 죽음을 애도한다. 나는 이런 크기와 모양을 한 아이폰의 죽음을 애도한다.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하드웨어를 애도하는 것. 영혼이 아니라 시체를 애도하는 것. <정신현상학>이 아니라 <몸의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 껍데기는 가라고 했던 게 백 년도 채 안 됐는데.


5.5.

  나는 아이폰 그 자체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실은 아이폰 그 자체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다. 지금 내 옆에 아이폰의 시체가 고이 누워있다(그렇다. 이 시점에 나는 이미 iPhone 12를 사용하고 있다. 글을 미루고 미루는 와중에 핸드폰 개통이 완료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몇 가지 수식어가 붙어야 그 답이 완전해진다. 나는 ‘사용하던’ 아이폰을 잃어버린 것이다. 교환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가 죽어버린 아이폰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이폰의 사용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이폰을 사용하던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 시간에 아무런 서사가 없다고 앞서 밝혔음에도? 그렇다, 서사가 없는 시간은 오히려 보통의 삶에 더 가까워진다. 아이폰의 죽음이 사건을 만들었고 삶은 정상 궤도를 벗어났다. 나는 따라서 보통의 삶을 잃어버린 것이다.


6.

  애인과 그런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다. 우리가 나중에 결혼해서 자식이 생기면, 우리의 옛날 사진들이 너무 많을 거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부모님의 옛날 사진을 '발견'하는 식의 일은 없을 거라고. 아날로그 사진은 천천히 썩어간다. 손때가 묻고 모서리가 찢어지고 뒷면이 누렇게 뜨면서, 1에서 0으로 천천히 수렴해 간다. 그러나 디지털은 오직 1과 0이다. 삭제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처음 그 상태에 머무른다. 죽지 않는 이상 살아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디지털 시대의 사라진 풍요로움은, 사물에게 오로지 두 가지 상태만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편의상 '죽음'이라고 이름 붙였던 아이폰의 상태는 0도 1도 아니다. 핵심 기능이 손상되었지만 여전히 제 일을 다할 수 있다. 아주 죽지는 않아도 아주 살지도 못하는. 내가 바로 이전 글에 사람들을 생각하며 썼던 문장을 기계가 체현하고 있다. 우리의 거리는 얼마나 가까웠는지. 그러니까 아이폰이 나에게 '말한다'고 표현해도 큰 무리는 아닌 것이다.


7.

  물론 이런 식의 사고는 내 전공과도 연관이 있다. 언론정보학과는 정확히 말하면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는 학과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형의 소통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이 학과의 중요한 분과로 HCI가 있다. Human-Computer Interaction. 인간과 컴퓨터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분야인데, 개념 자체가 전위적이지 않은가? 이제 커뮤니케이션은 인간의 독점적인 특성이 될 수 없다. 인간은 인간이 만든 기계와도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옳은 이해일지 모르겠으나, 2년 전에 들었던 '기술 비평'이라는 수업이 이러한 연구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그 수업은 교수님의 저서로 진행됐는데 제목이 <공명: 미디어 기술 비평>이었다. 예술을 비평하며 사유하듯, 이제 기술도 비평의 영역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것이 교수님의 견해였다. 가령 컴퓨터 내의 창을 왜 '창(窓)'이라고 부르는지, 왜 우리는 전자펜을 통해 다시 손글씨의 시대로 진입했는지 등을 사유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하나의 기술을 골라 그것이 역사 안에서 물질적, 관념적으로 어떻게 반복되었는지를 레포트로 작성하는 것이었다. 그때 교수님은 우리에게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하드웨어 기술을 선택할 것을 주문했다. 당시 그것이 레포트 작성을 몇 배로 까다롭게 만들었으나, 어쩌면 교수님이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견했던 것일지 모르겠다.


8.

  지금까지 이 글을 읽어준 (고마운) 사람들은 일종의 어색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나 역시도 쓰면서 깨달은 것인데, 바로 이름이다. 그토록 아끼고 애착을 느꼈으면서(물론 그 사실도 이제야 알았지만), 아이폰에게 마땅한 이름 하나 지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는 당연한 일이다, 도대체 누가 자기 핸드폰에 이름을 붙이고 다니겠는가? 그러나 인류는 진화 이래 소유라는 폭력을 행사하고자 할 때 줄곧 이름을 활용했다. 그렇게 별들에 '오리온'이 붙었고, 수열에 '피보나치'가 붙었고, 돼지에 '옥자'가 붙었다. 그런데 왜 아이폰은 아이폰인가? 왜 내 아이폰도 아이폰이고, 네 아이폰도 아이폰인가?

  이름은 고유 명사다. 고유성의 징표다. 우주의 별들은 고유하고 1 1 2 3 5… 는 고유하고 슈퍼 돼지는 고유하다. 아이폰은 고유하지 않다. 내 아이폰과 네 아이폰은 똑같이 생겼다. 아이폰은 언제든 복제 가능한 기술 시대의 산물이다. 애착은 물론 이름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고유성이라는 필요조건을 갖추지 못한 아이폰은 이름이 붙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의 불충분함을 열등함으로 치환할 필요는 없다. 벤야민도 아우라가 붕괴된 기술복제시대를 긍정적으로 전망하지 않았는가. 아이폰은 아이폰이라고 부르면 된다. 그것이 아이폰의 존재 방식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방법이다.


9.

  복제 가능한 것들은 고유하지 않다. 고유하지 않으면 이름이 붙을  없다. 이것이  명제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확실한 반례가 있다. 장난감.

  예상하다시피 이 글의 제목은 <토이 스토리>에서 따 왔다. 장난감 이야기. 픽사 애니메이션 중 가장 직관적인 이름이 아닐까. 그런데 니모의 영화는 <니모를 찾아서>, 월-E의 영화는 <월-E>다. 왜 <토이 스토리>는 <우디 스토리>나 <버즈 스토리>가 될 수 없는가?

  <토이 스토리>라는 제목은 우리가 우리의 장난감을 대입하여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한다. 나에게는 <토이 스토리>가 <허루스키 스토리>가 되는 것이다(내가 제일 좋아했던 시베리안 허스키 인형이다. ‘루’를 왜 갖다 붙였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장난감의 복제 가능성으로 인해 이 영화는 무한한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 아이들 수만큼의, 또 한때 아이였던 어른들 수만큼의 <토이 스토리>를 만들어낸 셈이다.


9.5.

  <토이 스토리>는 아우라를 잃어버린 대상들의 드라마다. 자신이 유일한 줄 알았던 장난감이 수많은 복제품을 목격하고,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갖게 된다. ‘우디’는 자기 발에 적힌 ‘앤디’를 보며 이 불안감을 해소한다. 자신의 고유성을 재확인하고 아우라를 되찾은 것이다.

  나는 아이폰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의 가능성은 앞서 말했듯 아이폰을 있는 그대로 아이폰이라고 부르는 것, 즉 복제를 긍정하는 것이다. 내 아이폰이 다른 아이폰에 비해 특별했던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타당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어떤 고유성도 없는 복제품에 불과했는가? ‘내’ 아이폰이 된 순간 이것은 곧바로 어떤 의미를 부여받은 것이다. 앤디처럼 나의 이름을 새기지는 않았더라도, 아이폰의 홈버튼에는 대체 불가능한 나의 지문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그러니까 내가 내 아이폰을 ‘아이폰’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수많은 복제품들을 아울러 부른 것이 아니다. 내 아이폰의 고유한 이름이 ‘아이폰’인 것이다. 보통 명사의 고유 명사화. 아이폰을 내 아이폰으로 인식하는 것. 이것이 두 번째 가능성이다.


10.

  그러니까 ‘아이폰 이야기’라는 제목은, 모두의 이야기면서 동시의 나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야기를 쓰는 사람으로서 어떤 이야기가 가장 훌륭한지 자주 고민한다. 세상만사를 꿰뚫는, 모두를 움직이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헛된 꿈을 꾼다. 그러다 보면 가장 상징적인,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를 찾게 된다. 그건 결국 아무 이야기도 쓰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우디와 버즈의 이야기는 얼마나 개인적이었는가? 그럼에도 그것은 당당히 <토이 스토리>가 되었다.

  아이폰 이야기. 아이폰에 대한 이야기. ‘아이폰’이라고 부르는 내 아이폰에 대한 이야기. 또는 아이폰으로 시작해서 이야기로 끝나는 글. 일단 나는 이만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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