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지금 여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창인 Oct 02. 2021

98. 슬픈 영화와 초면의 세 관객들

  이런 상황을 가정해 본다. 나는 지금 작은 극장에 간다. 그곳은 허구의 공간이므로 굳이 어떤 독립영화관의 이름을 떠올릴 필요가 없다. 극장에는 단 하나의 상영관이 있다. 오 곱하기 오, 총 스물다섯 개의 좌석이 있는 작은 극장의 작은 상영관이다. 당연히 가장 앞줄이 A열, 왼쪽부터 1번이다. 나는 B4 석을 예매해 두었다. 이렇게 작은 곳에서 앞줄이 상석임은 알지만, 어디서든 맨 앞이나 맨 뒤는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가 시작하기 오 분 전에 극장에 도착한다. 한 남자가 이미 자리해 있다. 내심 영화를 독차지할 수 있겠다던 기대가 무너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도를 느낀다. 이 시대에 극장까지 걸음하는 것은 관객을 보러 가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E3 석에 앉아 있다. 나는 그 남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므로 E3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E3은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는데 공간이 어두워 그 색깔을 분간할 수 없다. 다만 내가 가정하는 이 상황이 겨울이라고 짐작해볼 뿐이다. 나는 E3이 하필 그 자리에 앉은 이유를 추리한다. 첫째는 그가 이런 극장이 처음이라, 무턱대고 뒷자리를 골랐을 수 있다. 그러나 여유롭게 다리를 꼰 모양으로 보아 이 추리는 틀렸다. 둘째는 그가 어릴 적부터 단체버스 뒷자리에 앉아 일진 행세를 하는 부류일 수 있다. 그러나 스크린만이 유일한 권력인 공간에서 위세를 부릴 일은 없으므로 이 추리도 틀렸다. 마침내 나는 그 역시 관객들을 보러 왔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나는 계획대로 B4 석에 앉아 그의 관객이 되어준다.


  영화가  시작하려는 참에 마지막 관객이 들어온다.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다. 나는  상황의 계절적 배경이 헷갈리기 시작한다. 여자는 A2 석에 자리를 잡는다. A2 분명 영화만을 보러  것이다. 그제야 나는  시작할 영화에 대한 상상을 잠깐 한다.  영화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오직 하나다.  영화는 슬픈 영화다. 사람들은 슬프지 않고 싶은데  슬픈 영화를 볼까? 슬프지 않고 싶어서 슬픈 영화를 보는 것이다. 자신의 슬픔을 영화의 슬픔으로 옮겨버릴  있기 때문이다. 나도 아마 그런 이유로 슬픈 영화를 보러  것이다.


  암전이 된다. 원래도 어두웠던 공간이  어두워진다. 그렇게 영화가 시작한다. 우리에게 모든 빛을 빼앗아  다음 유일한 광원을 제공하는 식으로. 그러나  사기극에 모두가 기꺼이 동참한다. 나는 한동안  관객을 잊고 오직 스크린에만 몰두한다. 그러다가 나까지도 잊어버린다. 나는 영화가 된다. 그러다 절정에서 코허리가 젖는 것을 느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그래야만 한다. 그게 사기극의 흔한 전개다. 그러나 이번 상황에서는 변수가 생긴다. 배우의 멍한 얼굴이 화면을 꽉 채운다. 그때까지 나는 영화였으므로 어떤 이유로 그런 얼굴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심지어는 어느 배우인지도 모른다. 아마, 프란시스 맥도먼드. 또는 줄리엣 비노쉬. 아니면 의외의 연기 변신에 도전한 안젤리나 졸리. 문제는 배우가 아니다. 느닷없이 A2가, 존재도 잊고 있던 A2가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나는 곧바로 영화에서 빠져나온다. 음료 거치대에 꽂아 놓은 아이폰과, 앞 열의 좌석들과, 극장이라는 공간을 인식한다. 눈 씻고 찾아봐도 이 장면에는 울음이 나올 만한 구석이 없었다. 그러나 A2는 여전히 울고 있다, 그것도 아주 서럽게.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곁눈질만으로 A2를 바라본다. A2는 아예 허리를 웅크려서 울음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나는 이 극의 전개를 망쳐버린 A2를 원망한다. 그러나 이내 계획을 변경한다. 영화 대신 그녀에게 나의 슬픔을 의탁하기로 한다.


  나는 A2가 이 장면에서 울어야만 하는 이유를 상상한다. 배우의 표정이 얼마 전 사별한 누군가와 닮았다거나. 그 멍한 얼굴이 짊어진 인류의 모든 고독을 자기 것으로 느꼈다거나. 또는 자신의 슬픔을 영화에 버리고 가려던 행위가 돌연 부끄러웠을 수 있다. 이 암실에서 오직 그녀의 울음만으로 옳은 추리를 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나는 A2와 같이 울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같이 우는 것밖에 없다. 그녀의 옆으로 가 눈물을 닦아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E3이 떠오른다. 바로 이 순간 E3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가 궁금하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E3과 눈을 맞춰서는 안 된다. 자리를 이동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뒤를 보지 않는 것이 극장의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나의 고개는 스크린을 향하고, 나의 눈동자는 A2를 향하고, 나의 의식은 E3을 향한다. 따라서 나의 눈물은 갈 곳을 잃는다.


  이런 경우에 영화를 끝까지 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더 이상 나의 슬픔을 팔아넘길 수 없기 때문이다. A2는 우는 데 성공하고,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슬픈 영화다. E3도 관객을 보려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을 것이다. 오직 나만 패배했다는 감정에 사로잡히며, 내가 여기서 사라져도 슬픈 영화와 초면의 두 관객은 무사히 살아남을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극장의 세 번째 불문율, 끝까지 남아있기를 깨야 할지 고민한다.


  그러던 찰나에 극장의 불이 켜진다. 영화가 끝났다. A2와 E3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다. 출입구가 열리고 대낮의 환한 빛이 극장을 비집고 들어온다. 그 빛은 모든 상상과 감정을 죽일 만큼 폭력적이다. A2와 E3은 차례로 그 빛을 향해 걷는다. 나도 마지못해 그들을 따라간다. 좁은 통로를 지나면 곧바로 건물의 바깥이다. 분명 한 길을 다 같이 걸었는데 그들은 어느새 각자의 경로로 사라지고 없다. 슬픈 영화와 초면의 두 관객은 죽었다. 결국 끝까지 남아있는 건 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