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지금 여기

13. 배우는 것과 배움이 되는 것

"또 그렇게 잘 산다"

by 백창인

어릴 적부터 배움이 되는 것에 익숙했다. 나는 장남이었다. 전화 여론조사를 진지하게 대답하던 나이의 동생은 존경하는 인물을 묻는 질문에 '형아'를 답했더랬다. 이제는 내 밑으로 두 명의 동생이 있다. 나를 배우던 동생은 어느덧 더 어린 동생에게 배움이 되어야 한다. 나는 배움이 되는 남동생과 배우는 여동생 모두에게 배움이 되어야 한다.


나는 모범생이었다. 시키는 대로 잘했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들의 배움이 되었다. 초등학생의 나는 그게 좋은 것인 줄로만 알았다. 중학생의 나도 그게 좋은 것인 줄로만 알았다. 친구들의 질문을 답할 때 희열을 느꼈다. 선생님의 칭찬이 고팠다. 인정받는 것이 행복했고 더욱 인정받고자 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이방인>을 읽고 처음으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몰라도 한참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뒤로 책을 많이 읽었다. 완독하지 못해도 앞의 몇 장을 배우는 데 의의를 두었다. 영화를 수없이 많이 봤다. 정말 행복한 배움이었다. 친구들과 토론을 했다. 그게 내 일이다 싶었다. 고등학교를 올라와서는 훌륭한 선생님들께 훌륭한 수업을 원없이 들었다. 두 시간을 연달아 질문하고 토론해도 힘들지 않았다. 배우는 것이 행복했고 더욱 배우고자 했다.


배움이 되는 일이 늘었다. 친구 몇몇의 눈물을 보았고 나는 안아주었다. 늦은 밤에 진지한 상담을 했고 나는 조언을 건넸다. 내 글을 잘 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나는 더욱 열심히 썼다.


이제 배움이 되는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내 앞에서 눈물을 흘려주고, 자신의 치부를 털어놓고, 내 생각을 읽어주는 것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한 일이다. 그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고 싶다. 다만 내가 틀린 배움이 될까봐 살이 떨리게 두렵고 불안할 뿐이다. 내가 준 것이 잘못될까봐 선뜻 나서지 못한다. 아직 너무 부족하다. 나는 정말로 부족한 사람이다.


마음 편하게 낮은 자세로 배우고 싶다. 그렇다고 배움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배움이 되는 것은 무섭다. 아직 다 배우지 못했는데 배움이 될 수도 있는지도 모르겠다. 또 그렇게 잘 산다 나는.


16.10.28. 씀

17.05.18. 다시 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2. 부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