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이 끝나면 바람에 날아갈 석회"
초등학교의 모래 운동장에서는 선이 따로 없었다. 대신 석회 가루를 담은 녹색 카트가 있었다. 카트를 움직이면 그 궤적에 따라 경계선이 그어진다. 경기장을 그리는 게 재밌어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고를 자처했다. 그런데 내가 그리는 선은 온통 삐뚤빼뚤했다. 반듯이 그렸다고 생각해도 뒤돌아보면 방향이 틀어져 있었다. 선생님은 잘만 그리시는데 내 선은 왜 이럴까. 그러나 선생님의 조언을 들은 뒤, 나도 곧바로 직선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아래를 보지 말고 고개를 들어라. 너가 갈 곳을 보고 걸어라.
나는 그 말씀을 오늘에서야 운동장 밖에서 생각해본다. 나는 고개를 들고 살았다. 내가 갈 곳을 보고 걸었다. 성적이 떨어져도, 숙제를 깜빡해도 잠깐 불안할 뿐 금세 잊어버렸다. 살짝 엇나가도 제자리로 돌아올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속 편하다는, 자만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고개를 숙이는 것이 오히려 속 편한 일이다. 제멋대로 석회를 남기는 것은 나의 선에 무책임한 짓이다. 무거운 고개를 들고, 피눈물이 날 때까지 목적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 그건 속 편한 것이 아니다. 미치도록 외롭고 힘든 일이다.
석회, 소동이 끝나면 바람에 날아갈 석회. 남는 것은 눈에 그린 곳에 있는 나. 그래서 더욱이 고개를 숙일 수 없다. 그 자리에 나는 누구와 있을까, 무엇을 할까. 그게 전부다.
17.04.19. 씀
17.06.01. 다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