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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정리하는 삶

"수많은 연락들이 버려지고"

by 백창인

학기의 끝에는 진저리 나는 짐 정리가 기다리고 있다. 모든 것을 뭉쳤다가 풀어내고,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며, 좋은 것은 한 번 더 보고, 내 무게를 느껴보거나 하는. 반나절 만에 일상을 허물고 빈 방을 마주하는 것은 미묘한 경험이다.


고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써주신 생일 편지를 다시 읽었다. 학교에 안 계셔서 그리움이 더하다. 보고 싶다고 연락하려다 이내 마음을 접는다. 관계가 짐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풀어낸 짐은 언젠가 정리해야 한다. 보고 또 보고 싶은 짐이라도 언젠가 뭉쳐야 한다.


선생님이 싫은 게 아니고 친구가 싫은 게 아니다. 그 관계가 진저리 난다. 카카오톡으로 시작해서 카카오톡으로 끝나는 관계가 진저리 난다. 카카오톡은 우리의 관계를 더 긴밀하게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더 성기게 하는 것이다. 기다림이 없고 여백이 없다.


어차피 정리하는 삶을 산다. 공부를 그만두기 위해 공부하고 일을 그만두기 위해 일한다. 어떻게 정리하느냐의 문제다. 지금의 방을 정리하고 나는 몇 장의 편지가 남았다. 그 글은 남는다. 수많은 연락들이 버려지고 그 글이 남는다. 정리하는 삶도 사람 나름이다.


16.12.23. 씀

17.06.03. 다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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