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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불신시대

"사람 하나 믿기가 그렇게 어렵다"

by 백창인

작년 이맘때 밤이었다. 부침가루를 사러 슈퍼를 가던 길이었다. 깜깜한 와중에 "학생"을 외치는 걸쭉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에는 쓰러졌지만 아직도 바퀴가 도는 자전거와, 엉거주춤한 자세로 누워있는 아저씨와, 아저씨 곁을 지키는 까만 개가 있었다.


개가 무섭고 낯선 이가 무서워서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경계심을 느꼈는지 아저씨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가 지금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졌는데 몸을 못 움직이겠거든. 여기 뒷주머니에서 내 핸드폰 좀 꺼내 줘." 119를 부를까요 했더니, "아냐, 아냐. 우리 마누라 부르면 돼. 여기 바로 집 앞이라 괜찮아."


그렇게 나는 모르는 사람의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저씨는 엉덩이가 바닥면에 붙은 채로 굳어있었기 때문에 핸드폰을 꺼내는데 애를 먹었다. 옆에서는 또 아저씨를 지킨답시고 개가 왕왕거렸다. 내가 뒷걸음질 치자 아저씨는 "안 물어, 안 물어"하며 건성으로 안심시켰다.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내고 손을 빼서 핸드폰을 드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불안이 스쳤는지 모른다. 뉴스에 보도되는 큰 사건은 항상 이러한 작은 부탁에서 시작한다. 내일 저녁 뉴스의 주인공이 될 것인가, 인정머리 없는 학생이 될 것인가. 그날 밤 그 자리를 지났다는 죄목으로 어려운 선택을 해야만 한다.


사람 하나 믿기가 그렇게 어렵다. 박경리 선생님은 제목도 참 잘 지으셨다, 불신시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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