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 1만 3천 원의 지성"
첫 번째 글이 <조우>였다. 쿤데라의 <불멸>을 적신 뒤, 보기 싫게 울어버린 그 책을 다시 만났을 때의 죄책감. 그런데 무슨 낯짝으로 그 책을 다시 샀는가. 두 번째 조우다.
나는 책을 함부로 사지 않는다. 도서관이라는 보물 창고가 있는데 무엇하러 책을 사서 읽는가. 두고두고 읽을 가치가 있을 때 비로소 지갑을 연다. 유독 책 앞에서만 인색해지기도 한다. 그 값이 너무 비싸다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얼마 전 가족과 청계천에 갔다. 책의 날이었다. 부스에서 이것저것 체험을 하니 그런대로 시간이 갔다. 저녁 즈음이 되어 아빠가 기분을 내셨다. 청계천 옆 교보문고에서 마음껏 책을 사라는 것이었다. 베스트셀러라 도서관에서 통 빌릴 수가 없던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그리고 쿤데라의 <불멸>을 골랐다. <농담>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아니었다. <불멸>이어야만 했다. 반들반들한 표지를 넘기자 빳빳한 종이 냄새가 났다. 나는 구원자라도 된 듯 첫 구절을 아로새겼다.
교보문고에는 책 외에도 여러 가지를 판다. 마음에 드는 볼펜이 있어 얼마냐고 물었더니 2만 원을 훌쩍 넘었다. 그러한 볼펜 몇십 개를 써가며 만들었을 쿤데라의 세계는 볼펜 하나만 못했다. 정가 1만 3천 원의 지성은 어떤가. 비싸게 보이다가도 터무니없이 싸게 보인다. 그러다 지성의 가격을 묻는 것조차 한심해 보여 생각을 그만두었다.
17.06.02. 씀
17.06.10. 다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