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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지금 여기

28. 쭉정이

"한 끗의 경계에"

by 백창인

"21세기의 창의성은 새롭게 창조하는 능력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다르게 해석하는 능력이다." 이 비슷한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동의한다. 시대 전체가 소재의 고갈을 겪고 있다. 사랑은, 꿈은, 갈등은 수없이 쓰였고 불렸으며 상영되었다. 이제 어떤 분야의 선구자가 되기는 꽤 힘들어졌다.


제임스 카메론과 같이 전혀 새로운 해답을 찾고자 하는 시도도 있다. 그 역시 존중받을 일이지만, 걸작이 꼭 혁명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패러다임을 깨는 것만큼이나 패러다임 위에서 뛰노는 것도 어렵다. 그래서 <사랑은 비를 타고> 만큼이나 <라라랜드>는 찬사를 받으며, 줄곧 복고만을 그리는 폴 토마스 앤더슨도 진가를 인정받는다.


재탕과 재해석은, 사골과 진국은, 졸작과 명작은, 거품과 거장은 한 끗 차이다. 한 끗의 경계에 수많은 예술인이 쌀알처럼 몰려든다. 평론가는 그 경계만큼 얇은 밀대로 되를 깎는다. 관객은 평론가더러 너무 야박한 인심이라며 욕한다. 나는 떨어져 나간 알곡을 부러워하는 쭉정이다.


16.12.13. 씀

17.06.14. 다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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