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하나 없는 섬"
<지금 여기>라는 글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지금의 나는 누구에게라도 맘에 그리는 여자를 얘기할 수 있지만 내일의 나는 잠시의 망설임 뒤로 그런 건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건 아직도 유효하다.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책 읽는 여자를 좋아하고 대화를 계속할 수 있는 여자를 좋아하고 자기 일에 몰두하는 여자를 좋아한다. 우선순위는 몰라도 이것이 흔히 말하는 이상형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사랑의 전제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사랑의 전제조건은 무엇일까. 사랑이 명제라면 그것이 필요조건 또는 충분조건이 되게 하는 명제가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생각해보았다. 기억일까. 나는 줄곧 내가 사귀었던 여자들의 무엇을 기억하지 못해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내 여자의 숫자나 단어를 기억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나는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수학 공식의 숫자와 필수 영단어는 잘만 기억나고 쉽게 잊히지 않는데, 기념일과 흘러가는 말들은 잘만 잊히고 쉽게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영어와 수학을 여자보다 사랑했을까. 그런 건 아니다. 내가 사랑하지 못한 걸까. 사랑이 기억이 아닌 걸까.
사랑이라는 말은 학생이 쓰기에 낯부끄러운 말이다.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무엇이 사랑인지도 잘 모른다. 그래 어쩌면 내가 사랑하지 못한 게 맞는 것이다. 이건 앞으로도 굉장히 어려운 숙제다. 사랑은 필요조건이나 충분조건을 가지지 않는 외딴 명제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리 하나 없는 섬에 어떻게 건너가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