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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소고기무국 (2)

"밥그릇을 비우는 노동"

by 백창인

밥상 앞에 앉았을 때는 이미 빈 그릇이 즐비했다. 밥풀떼기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밥그릇부터, 고사리, 호박전, 도라지, 문어가 드문드문 잔챙이만 남았다. 어차피 그런 반찬들은 내 관심사 밖이었다. 나는 원체 편식이 심했다. 학교에서 퍼주는 나물과 채소는 그대로 잔반통에 버렸고, 집에서는 젓가락도 대지 않았다. 요즘은 그만큼 얄미운 짓은 안 하지만, 그래도 제사상은 여전히 어려운 식탁이었다. 큰집 대문에서부터 풍기는 낯선 냄새는 맡아온지 1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썩 유쾌하지 못했다. 어렸을 때 몇 번 맛봤던 생선은 차갑고 딱딱했다. 낯가림 마냥 한 번 반찬에 정을 들이지 못하니 계속 서먹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편식만 하고 살 수는 없겠지 하고 마음먹었을 때는 이미 내 앞의 반찬들을 치워버린 뒤였다. 큰엄마도 내가 가려 먹는 것을 아시고 굳이 반찬을 새로 가져다 놓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네가 나물도 먹었니?" 하실까 두려워 "나물 조금만 주세요."라고 도저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앞에 놓인 일용할 양식은 오직 흰쌀밥과 소고기무국 뿐이었다. 소기름이 알갱이를 지은 밭 사이로 잡초처럼 삐죽 솟은 파 조각, 땅 깊숙이 느닷없게 박혀 있는 소고기와 두부 몇 점. 싱겁진 않았지만 짜지도 않았으며, 아주 뜨겁지도 않은 게 따뜻하고 좋았다. 모두가 말없이 수저를 들고 남은 음식을 먹었다. 나는 숟가락만 들었다. 밥 한 숟갈 떠서 입 안에 머금고, 다시 국을 한 숟갈 떠서 쌀알 사이사이를 적셔주었다. 고기도, 두부도, 파 조각도 하나씩 떠서 꽉 찬 입 안에 욱여넣었다. 그리고는 씹었다. 우걱우걱, 밥에서 나온 단물이 건더기와 섞여 소고기죽 비슷하게 되도록 씹고 또 씹었다. 다시 밥 한 숟갈, 고기 하나, 두부 하나, 파 조각 하나. 우걱우걱, 우걱우걱 씹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흰쌀밥은 줄어들 생각을 안 했다. 길게 늘어지는 식사 시간은 나에게 밥그릇을 비우는 노동이었다. 어떻게 해서 밥은 다 목구멍에 쑤셔 넣었지만 어른들 틈에서 먼저 일어나는 것이 영 난처했다. 소고기무국이 흥건히 남았다. 허리를 푹 숙인 채, 그릇째로 들었다 놨다 하면서 고깃국을 홀짝였다.


싱겁진 않았지만 짜지도 않았으며, 아주 뜨겁지도 않은 게 따뜻하고 좋았다. 아니면 그렇게 느끼는 것뿐일까.


16.08.25. 씀

17.06.21. 다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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