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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지금 여기

36. 풍경

"깎아낸 손톱처럼"

by 백창인

이토록 외진 산골에 있으면 작은 것에도 감동을 받는다. 작년 이맘때, 노을빛이 어린 기숙사 벽면이 그렇게 아름다웠다. 붉은 벽돌들이 거대한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타올랐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초저녁의 기숙사에 미치지 못했다. 우리의 기숙사는 그 날, 그 빛을 받으려고 그 자리에서 여태껏 기다린 듯했다.


숨막히게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우연히 호사를 누리게 된 나는 곧장 교실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따금씩 같은 자리에 서서 그때의 풍경을 기대했지만 야속하리만큼 다른 모습이었다. 사진을 찍어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그 사진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다를 게 없을 것이었다. 타오르던 불꽃은 깎아낸 손톱처럼 쉽게 죽을 것이었다.


그 풍경은 마음에만 남겨야 하나 보다. 너무나 선명히 어른거리는데 그 풍경 한 번을 못 본다.


17.04.14. 씀

17.06.22. 다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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