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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지금 여기

41. 경복궁 (1)

"이름을 잃고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by 백창인

마음이 뒤숭숭할 때 경복궁에 한 번 가야겠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편을 읽고 나서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아는 경복궁은 어쩌다 서울 한 번 나갈 때 차창 밖으로 보이는 광화문이 전부였다. 눈으로 보고 발로 걸으면 무언가 남을 것 같았다.


겨울방학 내내 수학 문제집만 붙들다가 시간이 꽤 지난 다짐이 떠올랐다. 바로 다음 날 나를 이끄는 책과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마을버스로 열 정거장, 지하철로 열 정거장쯤 되는 소소한 여행길이었다. 책가방 없는 등허리가 이렇게 가벼울 줄 몰랐다. 내가 느끼는 무게는 오직 떡볶이 코트 한 벌과 책 한 권, 그리고 두 귀에 꽂힌 이어폰뿐이었다. 그마저도 차창 너머 휙휙 지나가는 풍경들, 간드러진 색소폰 선율처럼 가볍게 떠다녔다.


경복궁역에는 궁 안으로 바로 통하는 출구가 있지만, 광화문부터 두 발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다른 출구로 향했다. 그런데, 집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역사(驛舍)까지 휘몰아치는 칼바람에 총알처럼 날리는 눈발 같은 건 없었다. 춥기도 무척 추웠지만 기분이 팍 상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드라이기로 한껏 멋 냈더니 칼바람이 마구잡이로 헝클어뜨린 머리. 둘째, 눈발이 낸 총알 자국 때문에 점박이가 되어버린 코트. 광화문 안으로 썩 좋지 않은 발걸음을 내디뎠다.


살을 에는 추위에도 사람들은 많았다. 체험학습을 온 초등학생, 데이트하는 연인, 단체사진을 찍는 중국인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그 가운데 혼자 껴 있다는 어색함에 잠깐 멈춰 섰으나, 가만히 있으니 훨씬 추워서 몸을 움직여야 했다.


여행은 그저 책 순서대로 걷는 것이었다. 흥례문, 근정문을 지나서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 모두가 글대로였고 사진대로였다. 아, 근정전에서 사신을 접견했구나. 아, 사정전에서 왕이 집무를 봤구나. 그렇게 수차례 책과 전각을 번갈아 고개를 까딱거리며 마음속으로 '아'를 되뇌었다.


고종이 머물던 건청궁을 마지막으로 '아' 여행이 끝났다. 30분 남짓, 경복궁을 오는 데 걸린 시간보다 짧았다. 손과 얼굴은 시뻘겋게 부어올랐는데, 이들이 감싸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부풀지 않았다. 맑은 콧물이 조금씩 새어 나오는 아찔한 추위에 마비라도 된 듯이, 나는 광활한 고궁 안에서 길을 잃었다. 아니, 목적지가 없으니 걸을 길이 없는 게 당연했다. 책을 덮었기 때문에 모든 기와집이 이름을 잃고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면 사라질 이름을 찾으려고 책을 다시 펼치지는 않았다.


결국 내가 다다른 곳은 유일하게 모습을 기억하던 근정전이었다. 석견(石犬)이 버티는 월대에 기대어 섰다. 여전히 바글대는 사람들 위로 광화문의 기와가, 그 뒤로 하늘을 찌를 듯한 서울의 건물들이 보였다. 도시 안에 자리 잡은 고궁, 고궁을 둘러싼 도시. 어느 쪽이든 이질적으로 보였다. 그 기묘한 전경은 곧 거울이 되었다. 나는 경복궁에 왜 왔는가? 내가 보는 나를 가꾸기 위해, 그러고는 남이 보는 나를 가꾸지 않았나? 지긋지긋한 수학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러고는 경복궁을 수학 문제처럼 풀고 있지 않았나?


눈이 그쳤다. 총알이 떨어졌을 테다. 추위도 사그라들었지만 더 있을 이유가 없어, 경복궁 안에 있는 역 입구로 향했다. 코트가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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