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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농부와 배우

"고구마가 가득했고 가지가 가득했다"

by 백창인

나는 농부와 배우를 더워질 무렵에 만났다.


배우를 먼저 만났다. 5월 26일 정확히 기억한다. 친구들과 대학로의 소극장을 찾았다. '마법의 꽃병'이라는 연극이었다. 배우들은 자리에 앉은 우리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다가 어느새 극을 시작했다. 일상적인 대화가 얼음이 녹듯 장면이 되었다. 연극을 끝까지 보고서도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이 융해였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당당하게 무대를 거닐던 여배우가 남았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오래도록 아는 사람이었다가 갑자기 액자 속의 상이 된 배우와 그의 능력이 부러웠다.


농부를 만난 것은 6월의 어느 주말이다. 아빠는 이전부터 밭일을 돕고 얼마의 작물을 얻어오셨다. 아빠에게 이끌려 내키지 않는 걸음을 했다. 농부는 수레를 끌고 있었다. 그분 역시 오래 전부터 나를 알았다듯이 익숙하고 호탕한 웃음으로 일을 시켰다. 연필만 쥐던 나에게는 워터호스가 낯설었다. 농부는 넉살 좋은 타박을 주었다. 그의 얼굴에는 고구마가 가득했고 가지가 가득했다. 거울이 있었다면 지우개똥이 가득한 내 얼굴을 보게 됐을 것이다.


배우와 농부가 결혼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짝일까. 그러나 그것만큼 잘 어울리는 짝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16.10.17. 씀

17.05.03. 다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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