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은 아날로그야 디지털이야?
- 아날로그. 마음이 딸깍 하고 켜지는 것도 아니고. 서서히 데워졌다가 서서히 식잖아.
- 사랑할 때야 그래 보이지. 분과 분 초와 초 사이까지 샅샅이 훑고 싶은 마음. 그런데 사랑한 후에는? 극적인 몇 장면만 남잖아. 사이사이는 다 날아가고.
- 야, 그게 죽고 나서 삶을 보는 거랑 뭐가 달라. 적어도 내부자일 때 사랑은 연속체고 사랑함은 연속 운동이잖아.
- 달라. 사랑은 끝나도 삶은 안 끝나니까. 늘 사랑의 외부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무슨 의미인지 알면서. 너 나 사랑해? 라는 말도. 아날로그 사랑을 한다면서, 0인지 1인지를 굳이 왜 묻겠어.
- 그건 그 순간을 도려내서 묻는 게 아냐. 너는 아날로그를 디지털의 조합으로 보고 있잖아. 사랑한다는 건 우리가 함께 만들어온 과거와 그 과거가 만들어 낸 지금과 이 지금이 만들어 낼 미래를 사랑한다는 거야.
- 우리 사귄다, 우리 헤어졌다, 우리 며칠 됐다. 이런 문법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 알면서 억지 부리는 거지? 네 말대로 문법이잖아. 디지털 언어로 아날로그를 설명하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괴리.
-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다.” 사랑은 아날로그여야 할 것 같고, 아날로그였으면 좋겠고. 그런데 우리의 체계가 디지털인 이상 사랑은 디지털일 수밖에 없는 거야.
- 마음 없는 인식론에는 관심 없어. 너한테도 관심 없으니까 걱정 말고.
말할 수 없는 것에 응당 해야 했을 침묵이 뒤늦게 찾아왔다. 둘은 손목시계를 찬 손으로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20.02.15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