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은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digitus에서 유래했다. 손가락은 숫자를 세는 가장 원초적인 도구였다. 셈은 곧 이름을 붙이는 일이다. 돌 하나 돌 둘. 별 하나 별 둘. 아날로그 연속체에서 특정 지점을 애써 호명하려는 욕망. 그래서 디지털은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이다.
낭만을 혐오하는 투사 따위가 되려는 게 아니다. 그저 인간됨에 솔직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의 불완전함을 긍정하는 데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한다. 허위와 기만을 걷어냈을 때 비로소 보이는 나약한 사랑을 믿는다.
숫자를 세던 손가락으로 네 전신을 훑어도 그 맵시를 온전히 기억할 수 없다. 내 코 언저리에 머물러 있던 네 숨결과 대기를 구별할 수 없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무빙워크 위에 서서, 아무리 뒤돌아 걷고 기억을 바느질해도 결국 앞으로만 간다. 그 끝에 다다랐을 때 남는 단 몇 개의 파편들을 누구보다 소중히 아낄 뿐이다.
나는 그렇게 사랑을 한다. 이것이 부디 네게 마음 없는 인식론으로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20.02.16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