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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bbbi Mar 25. 2017

왜 퇴사했니? 살려고요.

#1


퇴사의 원인은 복합적인 것이었다.


서울에 있는 동안 신세를 졌던 친척에게는, 본업보다 다른 부서일을 많이 해서 그만두었다고 했고, 고향으로 내려와 부모님께는 내 가치관과 어긋나는 일을 하기 힘들었다고 했고, 친구에게는 서울 생활이 너무 외롭고 지쳤다고 했다. 그때의 나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두 달 전 갓 퇴사를 했을 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들 왜 퇴사했냐고 물었고, 나는 쌓인 여러 문제와 감정을 한 두 마디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참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입사하고 첫 달째에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꿈꿔왔던 크리에이티브, 트렌디함, 숱하게 들어온 광고가 새로 나아가야 할 방향, 콘텐츠 메이킹 등의 입사 전 기대는 매너리즘에 빠진 상사, 그저 옛 사고에 멈추어 있는 상사, 이전부터 해온 뻔한 결과물, 회식자리에선 지난날의 화려했던 잘 나가던 시절, 룸살롱 이야기, 접대 이야기로 돌아왔다. 생각한 방향과는 너무나 달랐던 회사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업계 특성상, 아니 현 사회적 상황상, 신입을 잘 뽑지 않아서 경력직에게는 조금 더 열려있는 취업문을 생각하며 버텨내기로 마음먹었다. 아침마다 화장실에 갈 때도, 출퇴근의 지옥철 속에서도, 잠들기 전에도, 1900원짜리 맥주 한 캔을 마시면서도 나를 다잡고 또 다잡았다.


선택을 하면  뒤돌아 보지 말라. 일단 선택을 하면 길은 그곳에 있다. 라고 누군가 얘기했다. 나는 이 글귀를 마음에 새기며 나를 다잡고 또 다잡았다.




그렇게 삼 개월이 흐르고

경영국장은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아니 내가 할 말이 있다고 시간 좀 내달라고 했다. 그 날은 약속했던 인턴 3개월이 끝나고 정직원 전환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하는 날이었다. 회의실에 들어섰을 때, 국장님이 먼저 말을 꺼냈다. ‘미안해서 먼저 얘길 못 꺼냈는데, 그래서 너를 피해 다녔는데 네가 먼저 용기를 냈네.’

미안해서. 뭐가 미안한 걸까.

‘회사 상황이 어려우니 3개월만 더 인턴을 해줄 수 있겠니? 그 이후엔 꼭 정직원을 시켜줄게. 미안하다. 네가 잘 적응하고 너에 대한 평가들도 좋아서 꼭 정직원 전환해주고 싶은데 어쩌겠니. 너도 우리 회사 상황 잘 알잖아.’


회사 상황을 물론 알았다. 한 때는 잘 나갔지만 경영악화로 내리막을 걷고 있는 회사였다. 누군가 나에게 자세히 말을 해줬느냐고? 그저 눈치로 알았다. 회사의 상황에 관한 회의에 인턴인 나는 당연히 제외되었고, 내게도 상황을 알려달라고 물을 때마다 그들은 너는 그냥 시키는 것만 하면서 다니면 된다고 했다. 회사 상황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나는, 그래, 인턴이니까.


나는 당장 갈 데도 없으니, 어렵게 취직했으니, 알겠다고 했다. 실망은 했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결과였다. 이미 광고대행사에서 1년 인턴, 2년 인턴은 수 차례 들어왔던 이야기였다. 그래도 6개월인턴이면 정직원이 된다니까 참아야지. 내부 누군가의 귀띔으로 내 이전 사원들도 그렇게 6개월 인턴을 했다고 했다. 회사가 잘 나갈 때도, 상황이 나쁠 때도.


어찌나 앞이 깜깜해지던지. 취직만 하면 일사천리로 풀릴 줄 알았던 인생이었는데 여전히 길이 안보였다.


또 그렇게 6개월은 순식간에 흘렀고

이번에는 경영국장이 먼저 회의실로 나를 불렀다. 여전히 회사가 힘들다고 했다. 다시 3개월만 더 인턴을 해달라고 했다. 나는 이직을 결심했다. 이전부터 지인에게 제안받았던 회사 면접을 봤고, 합격했다. 좀 더 좋은 페이와 복지 제안을 받았다. 인턴 경험을 살려 2개월 수습이 끝나면 바로 정직원이 되도록 해준다고 했다. 정말 많이 흔들렸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 돈인가, 하고 싶은 일인가 끊임없이 고민한 결과 그 회사에 가지 않았다. 물론 서울에 정착하기 위해 인턴 월급 이상이 필요했고,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그곳은 홍보대행사였고, 나는 아직 광고인의 꿈을 이루고 싶었다.




나는 아직 광고인의 꿈을 이루고 싶었다.

그때부터 나는 더 필사적으로 광고인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서 나는 나의 솔직한 심정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나는 너무나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었다. 그러다 가장 의지했던, 생에 처음으로 멘토로 삼은 분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도움이 한 때는 공짜인 줄 알았으나,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는 없었다. 내가 기대한 멘토는 내 생각과 달리, 내게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불쌍하고 안돼 보여서 챙기게 되었고, 나중에는 곧잘 카피도 쓰고 나를 잘 따라서, 그렇게 너를 여자로서 좋아하게 되었다고 했다.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고백을 받는 순간, 그 충격은 꽤 컸다. 하루 이틀을 버텼지만, 버틴다는 말로 더 이상 버텨지지 않았을 때, 나는 회사에 사표를 냈다.


나는 회사에 사표를 냈다.

내막을 모르는 모두가 말렸다. 처음엔 회유를, 이후엔 ‘너 다시는 이 업계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그만두지 마’라는 협박(?)까지 온갖 붙잡는 말을 듣고도, 나는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나는 설을 앞두고 싸구려 햄세트를 들고 도망치듯 고향으로 내려왔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모든 이별의 순간이 그렇듯, 좋았던 때도 많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칭찬을 받고 설레서 퇴근길에 혼자 노래를 부르며 실실 웃던 기억, 밖에선 들을 수 없었던 업계만의 이야기를 듣고 흥미로웠던 기억, 꿈꿨던 업계 내의 소속감, 많은 좋은 사람들과 대화하며 명함을 주고받았던 기억, 첫 월급으로 부모님께 식사를 대접했던 기억, 동생들에게 멋지게 용돈을 쏴 주던 기억. 모든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확고해졌다. 나를 버리면서까지 버텨내는 것은 책임감이 아니라, 잘 못 살고 있는 것이라고.
내 삶의 기준은 나라는 것을.

그리고 이내 버스 좌석 옆 창문에 비치는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충혈된 눈, 푸석푸석한 피부, 쥐어뜯은 듯한 머리. 다 괜찮았다. 그런데, 무엇보다 '괜찮아, 잘 버텼어'라는 말 한마디만 들어도 금방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내 표정. 그때 더 확고해졌다. 나를 버리면서까지 버텨내는 것은 책임감이 아니라, 잘 못 살고 있는 것이라고. 내 삶의 기준은 나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많이 성장했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말을 정말 너무나도 싫어하지만 현재는 어쨌든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너무나도 즐거운 것이라는 게 확고해졌고, 가진 거 없어도 솔직해지자는 가치관이 더 뚜렷해졌으며, 좋은 사람들의 호의를 많이 받았고 감사함을 느꼈지만 세상에 결코 공짜는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처음으로 단단해졌다. 그리고 이내 그 성장통은 그림과 글을 통해서 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변했다. 블로그에 다시 그림을 그려 올리기 시작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스스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욱 꾸준함과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영어회화를 배우기 시작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바쁜게 좋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나날들

하루를 온전히 생산적인 일로 채운다는 것은 분명 피곤한 일이다. 그리고 분명 성장하는 삶이다. 온 오감을 곤두세워 좋아하는 일들로 채우니 하루하루가 살아있는 느낌이다. 수많은 고민들과 잡념 대신 버스 창문 너머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보이고, 피어나는 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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