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내가 어릴 때 참 착한 아이였다고 했다. 동생과 나란히 유치원을 다닐 때의 일화인데, 한복을 입고하는 수업이 있었다고 한다. 엄마는 나와 동생의 손에 한복을 곱게 쥐어 보내 줬고, 그날 유치원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다고 했다. 빨강이가 동생 수업이 끝난 것을 보고 동생반에 들어와서 동생 한복을 개어주고 갔다고, 세상에 이런 누나는 없다고 선생님이 꼭 칭찬해 주라고 했다고 한다. 당사자는 기억에도 없는 이 일화가 엄마에겐 얼마나 인상이 깊었는지, 엄마가 폐백 때 준 봉투 안에도 이 내용으로 쓴 편지가 있었다. 그때의 널 엄마는 기억한다, 딱 결혼 생활도 그렇게 하면 된다, 믿는다... 엄마에게 와닿는 사랑의 형태는 그런 것이었나보다.
난 엄마가 원하는 사랑의 형태가 불만족스러울 때가 많았다. 어떤 동기에서든지 내가 하고 싶어서 자의로 하는 것은 괜찮았다. 누구 하나 알려주지 않았다던데 용기 있게 동생 반에 들어가서 한복을 개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기억도 안 나는 어린 내가 그때 당시 동생에게 해주고 싶은 사랑의 형태였나 보지. 하지만, 그 외에 넌 누나니까 동생을 챙겨야지, 누나니까 동생에게 양보해야지, 누나는 동생이랑 싸우면 안 되지- 같은 것들은 싫었다. 대체 ‘누나’ 두 글자가 뭐라고 마치 성역처럼, 모든 것을 거역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상황 자체가 억울했다. 게다가 내 동생은 아주 영리하고 영악해서 이 점을 잘 이용했다. 내 앞에선 자기 원하는 걸 갖게 해달라고 떼를 마구 쓰다가, 내가 이유가 있어 안 된다고 하거나 싫다고 하면 바로 엄마를 부르며 울었다. 신기하게도 내 앞에선 눈만 으앙 하고 울다가 엄마가 오면 눈에서 눈물을 또륵 만들어 흘려내었다. 진짜 여러모로 난 놈이다, 내 동생은.
집에서도 엄마 아빠는 잔심부름은 늘 나를 시켰다. 이유는 내가 누나라서. 특히나 아빠는 커피 심부름을 그렇게 시켜댔다. 하루에 믹스커피 세 잔을 마시고도 꿀잠을 자는 데 무리가 없는 아빠는 입이 심심하다 싶으면 내게 커피 한 잔만 타오라고 했다. 왜 맨날 나한테만 시켜, 동생에게도 시키라고 입이 댓발만치 나와서 투덜거리면 엄마는 그래도 한번은 나, 한번은 동생, 이렇게 순번을 돌리기도 했는데, 아빠의 커피 심부름은 늘 내 독차지였다. 반쯤은 답을 알면서 물었다. 내가 여자라서 남동생이 아닌 나에게만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거냐고 패기롭게 물었다. 아빠는 아니라고, 더 좋아하는 자식이 만들어주는 커피를 먹고 싶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물러터진 나는 또 좋아서 실실 웃으면서 물을 끓이곤 했다.
미우나 고우나 내 동생은 딱 하나였다. 우리집 내에서 동생 하나 챙기는 건 그래도 이해가 갔다. 동생도 동생 노릇을 했고 날 (매우 미흡하긴 했지만) 누나 대접해줬다. 하지만 추석이나 설 같이 대규모의 가족들이 잔뜩 모인 친척집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태생이 물러터진 나는 언니든, 조카든, 가족관계에서 붙을 수 있는 뭐 그 밖의 다른 지위(?)들은 갖고 있어서 좋았던 적이 없었다. 죄다 언니기에 양보해야 하고 누나기에 동생들 챙겨줘야 하는 것이 기본 옵션이었다.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으러 나가도 동생들 다 데리고 가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데려간 애들 것까지 다 사서 돌아오면 안 데려간 애들 것은 왜 사 오지 않았냐고 혼났다. 누구 하나라도 더 이뻐서 놀아주면, 다른 동생이 뒤에서 나에게 섭섭해한다는 소리를 친척들 입을 통해 들어야 했다. 기본을 해내고 있는데도 추가적인 요구 사항이 더더더 붙을 때도 있었다. 언니가 돼서 동생이 그러는데 안 알려주고 뭐 했어? 동생에게 먼저 전화해서 진로 상담 좀 해줘봐. 조카가 되어서 인터넷 주문쯤은 도와줄 수 있잖아- 같은 것들은 정말이지, 날이 가면 갈수록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거기까지 해야 하지? 왜 사촌언니랑 오빠도 안 하는 걸 나한테 시켜? 나도 언니랑 놀고 싶은데 미취학 아동인 다른 동생들까지 골고루 챙기며 어떻게 다 같이 놀아? 왜 그 집 아들이 안 하는 걸 내가 조카라는 이름으로 도와줘? 다들 왜 나는 안 챙겨줘?
개개인으로 보면 모두가 좋은 구성원이었다. 하지만 친가 외가 모두가 대가족인 형태로 집합되었을 때의 첫째도 아닌, 그렇다고 막내도 아닌 애매한 둘째 셋째 정도의 지위는, 피로하기만 했다. 어릴 때는 어른들이 내게 요구하는 것들이 전혀 이해도 가지 않았다. 사실 어른이 된 지금도 명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K-장녀의 장녀이기 때문에 그 역할들이 자연스레 내게 넘어온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만 할 뿐이다.
아마 엄마와 아빠도 가부장적인 사회의 가족 구성원으로 평생을 살았기에, 두 분이 익숙하고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역할이 있을 것이다. 말은 그렇게 안 했어도 각자가 생각하는 ‘딸은 여자답게, 아들은 남자답게’ 같은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손위의 자녀는 동생들을 살뜰히 챙겨야 한다고 당연히 생각했을 것이다. 나도 눈치껏 잘 해보려 애를 쓴 적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동생들과 마찬가지로 ‘어린’ 내게(나도 어렸다!)는 과하지 않나 생각했다. 정확히 정의할 순 없지만서도 막연히 버겁다고 느껴지던 어린 시절의 누나, 언니의 역할 같은 것들은, 아마도 엄마와 아빠도 어릴 때부터 짊어 메도록 요구받던 무게감일 것이다.
지금까지도 아빠에게 감사한 것은, 설명을 요구하는 내게 아빠는 단 한 번도 ‘니가 딸이어서, 여자라서 그래’라고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아빠의 진짜 속마음은 그게 아닌 것 같다고 느껴진 적도 있었지만, 적어도 돌아오는 답은 그랬다. 엄마 아빠는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을지언정, 그걸 자식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차별의 형태로 물려주지는 않으려고 평생을 무던히도 애를 썼다. 덕분에(?) 나는 더 이상은 그 역할들을 물려받을 생각이 전혀 없는 뾰족한 어른으로 각성하며 자랐다.
먼저 장가간 동생이 나보다 먼저 아빠가 되게 생겼다. 처음 소식을 듣고 당연히 축하하면서도, 한편으론 기분이 이상했다. 평소에도 종종 순서만 바꿔 일찍 태어났으면 내가 빨강이 오빠 할 수 있었는데- 라며 까불대는 자식인데, 동생이 먼저 아빠가 되다니 우리집 서열은 엉망으로 꼬여버렸다는 생각에 배가 조금 아팠다. 하지만 서열이나 호칭을 매우 중요시하는 엄마가 불호령을 내리며 때가 되면 알아서 서열 정리를 해줄 거란 생각에, 얄팍한 누나라는 지위가 처음으로 작은 위안이 되었다.
꽤 고가인 아빠의 필름 카메라 소유권을 쿨하게 동생에게 양보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곧 아빠가 될 동생이 나중엔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자 그건 또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나에게 다시 돌려달라고 했다. 고모가 되어서 조카한테 그것도 못 주냐고 했는데 못 준다고 했다. 어, 못 줘. 고모가 왜, 조카가 뭐, 그럴 거면 우리 아빠꺼 내게 다시 돌려줘.
조카가 태어난 지 오늘로 딱 6일째다. 동생도 닮은 것 같고 올케도 닮은 것 같고 돌아가신 할머니도 닮은 것 같고, 오늘은 이상하게 내 얼굴도 살짝 보이는 것 같다. 나한테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요구 사항이 참 많은 엄마가 할머니가 되더니 인자해졌다. 아기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기만 하면 된단다. 얼씨구. 그런데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고, 나도 같은 생각이다. 우리 조카는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잘 자라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아빠 카메라를 내가 갖는 게 뭐가 중요해. 그래, 할아버지 카메라 너 가져라, 소중하게만 관리해다오. 우리 조카 아주 쪼그마하고 매우 소중하다.
어느 날, 설명할 수도 없게 무례했던 한 가족 구성원의 행동을 가지고 동생과 실컷 뒷담화를 하던 날, 동생이 말했다. 그래도 엄마 곁에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들고, 특히나 엄마에게 잘하는 이유가 뭔지 누냐는 아냐고 물었다. 내가 알게 뭐야, 옆에 있어봤자 그런 짓이나 할 거면 있으나 마나라고 열을 냈다. 동생은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기에 결국은 다 알아준다고 날 달랬다.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장기적으로는 다를 수 있다고. 내가 해준 만큼 상대가 해주지 않았다고 심적으로 섭섭해할 수는 있지만, 꼭 해준 만큼 그대로 돌려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언제 내 동생이 이렇게 어른이 되었지?
우리집은 엄마가 사람들에게 참 잘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에게도 잘 해주고, 또 기대하는 게 많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난 엄마가 그릇이 크고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엄마 딸인 나는 죽었다 깨나도 그런 대인배는 못 된다.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자 왕관을 쓰라고 한다면, 난 쿨하게 왕관을 집어 던지고 나갈 것이다. 쥐가 난 목에 붙이게 될 파스 값도 계산하는 소인배가 나다. 그런 소인배에게도 고모라는 위치는 느낌이 달랐다.
나는 친가 외가 양쪽에 이모도 삼촌도 아주 많았지만, 딱 고모만 없었다. 내 동생은 하나뿐이고 동생은 남자니까, 비록 고모는 없지만 언젠가 내가 고모가 되겠다고 막연히 생각만 했다. 그리고 지금, 감사하게도 동생과 올케가 그 자리를 만들어줬다. 내가 뭘 해서 생긴 자리가 아니라, 동생네가 엄청나게 고생해서 만들어준 자리였다. 그들의 고생 덕에, 난 가만히 앉아서 고모가 되었다. 작고 소소하지만 소중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지위가 생겼다. 막내이모가 빨강이 고모 돼서 좋겠다며 연락해왔다. 빨강이 누나 돼서 좋겠네-는 기억이 안 나지만, 지금 내가 고모가 된 건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만들어준 동생네에게 감사했다.
왠지 할 일 없는 백수 고모면 안 될 것 같다. 일도 열심히 하고 놀기도 잘하는 그런 고모이고 싶다. 갓 태어난 애가 뭘 알진 모르겠지만, 나중에 그 아이가 커서 고모는 뭐하냐고 물었을 때 멋진 고모라고 느끼길 바라며, 왠지 또 뭐든 열심히 살아내야 할 것 같은 원동력이 생긴다.
자리는 내가 원해서 그 자리에 갈 수 있고 없고를 정하는 게 아닌 것 같다.
누군가가 만들어준 자리에 무거운 책임감보다 먼저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그릇은 안 되지만, 애는 써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