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모든 면에서 아주 애매했다. 어렸을 때부터 책도 좋아하고 글도 잘 써서 나름 자잘자잘한 글쓰기 상도 받은 것 같은데, 아주 큰 상. 예를 들자면, 전교에서 글쓰기 1등만 주는 상이라거나, 교육청, 시 단위에서 주는 큰 글쓰기 대회에서 상을 탄다거나,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나이 먹고는 글은 안 썼다. 뭐 그 정도가 잘하는 거라고.
교복 시절에는 음악 듣는 걸 아주 좋아해서, 나중에 음악방송 PD가 되거나 라디오 PD가 되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우리 오빠들을 내 손으로 아주 그럴싸한 무대에 꼭 세우고 싶었다. 그런데 방송국 PD는 그 정도의 가벼운 마음으로 가질 수 있는 타이틀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학벌 사회에서 성적으로 1등부터 꼴찌까지 줄을 쫙 세웠을 때 나름 앞줄에 가깝게 서 있는 친구들이 갈 수 있는 정도의 학교급은 졸업해야, 그나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했다. 난 거기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되기 위해 싫어하는 공부를 죽어라고 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눈에도 안 보이는 막연함을 실천해 낼 원동력은 늘 애매했다.
주제에 눈은 높아서, 뭘 하든 항상 잘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하는 게 아니면 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 못할 것 같으면 애초에 시도하지도 않았고, 조금 하다가도 금세 흥미를 잃고 포기해버렸다. 어떻게 보면 내가 취미를 갖더라도 끈덕지게 하지 못한 이유가 그거일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하든 그 자체로 즐길 수가 없었다. 내가 조금 잘하는 것처럼 보이면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보이고, 아무리 애를 써도 저 정도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금새 기가 죽었다. 그래서 또 접었다. 기타를 쳐도 무조건 잘 해야 해, 운동을 해도 무조건 잘 해야 해- 좋아하지만 잘하지는 못하는 그런 상황? 그냥 내가 안 좋아하는 것으로, 덜 좋아한 것으로 하자. 그렇게 맘을 접어버렸다.
취미가 아닌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주어지거나 내가 하게 되는 일은 유니크하고, 특별하고, 아주 좋은 완벽에 가까운 퀄리티로 끝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쟤는 일 참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취미는 하다가도 언제나 도망갈 수 있었지만, 일은 그러지를 못했다. 그래서 괴로웠다.
대학 신입생 시절, 동아리 연습실에서 기타를 쥐고 띵가띵가 하고 있는데, 학교를 졸업한 지 한참이 된 듯한 사회인 선배가 불쑥 방문했다. 어라 기타 후배- 하면서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너 무슨 과니? 저, 언론정보학과요. 선배는 내 과를 듣자마자 반가워함과 동시에 잔뜩 걱정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여기서 노닥거리지 말고 빨리 탈출해서 언론고시 준비해라. 너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또 다른 어느 날, 생전 처음 보는 선배가 철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학과였는데, 그 선배는 이제 짐을 싸서 언론고시를 준비하려고 노량진에 간다고 했다. 선배는 방송 기술직을 준비한다고 했다. 지금 가면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이뤄내기 전엔 돌아올 생각이 없다고 했다. 너도 빨리 준비하라고 했다. 제대로 방향 잡지 못하고 있으면 나중에 너 고향으로 돌아가 지역에서 고래 축제나 불꽃 축제 같은 것들을 하는 PD가 된다고 했다. '어라. 그런 것도 피디가 있어요? 그게 왜? 너무 좋은데?' 하는 나를 보며 선배는 혀를 끌끌 차며, 그냥 지금 널 데리고 노량진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선배는 꽤나 오랜 몇 년간 자취를 감췄고, 학교를 졸업한 난 그때 그 선배가 말하던, 그 고래 축제와 불꽃 축제 행사장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발에 땀이 나도록 행사장을 뛰어다니던 어느 날. 학창 시절의 유일한 멘토, 내 마왕, 신해철이 불의의 사고로 응급실에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내가 기억하는 그는 언제 어느 자리에 있건, 자기 할 말을 하는 자기 신념을 비굴하게 굽히지 않는 멋진 어른이었다. 그 사이에 사회생활하는 어른이 된 나는, 나 먹고사느라 바빠 요즘은 그가 어찌 사는지 놓치고 있었지만, 지 다 컸다고 마왕 없이도 괜찮은 그런 어른은 감히 아니었다. 나는 계속해서 그의 조언과 가이드가 필요했다. 살아가다 언제건 그의 잔소리가 필요한 순간, 그도 그 자리에 당연히 있을 줄 알았다. 그렇게 언제나 라디오처럼, 묵묵히 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아팠다. 위독하다고 했다.
나에게는 가족과도 같은 사람이지만, 남들이 봤을 땐 그냥 '연예인'인 한 사람의 소식에 멘탈이 흔들려 행사를 망칠 수는 없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래가며 일했다. 제발 괜찮아져라 괜찮아져라. 이건 아니잖아.
그 날은 모두에게 기도했고 아무 탈 없이 잘 흘러가고 있는 행사장에 있는 모두에게 감사했다. 하라는 건 안 하고 대체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리는 지키며 노닥거리는 진행요원 애들도, 그래 그 자리에 잘 있으면 됐어. 전화는 안 받았지만 쨌든 제시간에 잘 도착해준 공연팀들도, 그래 그 자리에 잘 있어 주니 되었어. 하지만 우리 마왕은 그러지 못했다. 며칠 뒤 또 다른 행사 하나를 마무리하고 난 뒤 부리나케 확인한 포털 기사에, 그는 다른 곳으로 떠났다고 했다.
침울한 얼굴로 다음 날 월차를 냈다. 우리 팀장은 길게 묻지도 않았다. 난 기차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가서 긴 추모의 줄에 서 있었다. 눈물이 나오지도 않았다. 여기 있는 엄청나게 많은 인파의 사람들도 다 각자의 사연으로 그와 함께 했던 사람이겠지. 다들 맘고생 했네, 다들 힘들겠다... 그렇게 차마 떨어지지 못하는 발걸음으로 돌아서려는데 화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20년째 순이짓을 하고 있는 우리 오빠들의 화환. 음악 외엔 전혀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어 보이는 그들이 이 자리에 보내온 화환이 조용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그런 것 같았다.
누가 잘났고 못났고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며 잘 있어 주는 것. 그 자체로도 서로에게 묵직한 힘이 되고 있었다.
4년 뒤 연락해 온 노량진 선배는, 내가 있는 지역의 M본부 방송기술직에 붙었다고 했다. 몇 년 만에 생긴 TO에 유일한 한 자리였다. 동아리 내 다른 선배들의 몇 년간의 수군거림이 한순간에 싹 사라지고, 선배는 그 기수 최고의 아웃풋이 되었다. 내가 봤을 때 그 선배는 다 가졌고 이제 꽃길 걸을 일만 남았는데도 종종 내게 전화해서 잔소리도 하면서 투덜거렸다. 너무 심심하고 인생이 허무하다고. 아 물론 선배는 지금 또 잘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