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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빨강 Oct 15. 2021

# 조상이 안 한 짓은 안 해. 그러니 자기탓은 그만해

  남 탓을 많이도 했다. 남 탓은 내 전공이다.

  요점도 맥락도 없이 주절주절만 대다가 회의 시간만 무한대로 늘리는 A도, 내 업무도 아닌데 맡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자꾸 이것저것 시켜대는 B도. 혼파망 속에서 밑에 직원들이 어떻게 갈려가고 있나 알지도 못하겠지만 뭐든 대충 알아서 각자 잘 결정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라며 책임 안 지는 책임자나, 샥샥 눈알만 굴리며 A에 붙었다 B에 붙었다 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이젠 내 옆에 와서도 간을 보고 있는 C. 물어보지도 않은 사내 정치 이야기에다 자기 개인사, 안물안궁 그런 tmi는 대체 왜 나한테 풀어대는 거야. 그럼 너네들이 내 한탄은 들어주고 내 사정은 들어줄 거니? 내가 하는 일 좀 나눠서 도와줄 거니? 온 천지에 신경을 긁는 것들 천지였다. 하지만 심리 상담을 하며 날 것 그대로인 스스로를 매주 직면하면서 나는 괴로워졌다. 이거, 내가 문제일 수도 있겠다.

  상담사 선생님은 내가 잔뜩 화를 내며 말하는 일화를 들을 때마다 그 순간 정확히 어떤 감정이었는지를 생각해보라고 했고, 나는 그 질문이 너무 고역이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화가 나고 억울한 그 사건 자체를 묘사하는 것은 잘할 수 있었는데, 정작 내가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몰랐다. 화가 났다는 것 말고는 정말로 몰랐다. 내 자신을 알고 싶어 시작한 일인데, 하면 할수록 더 막연하고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나는 서서히 나아지고 있었다. 가슴 벅찬 성취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상담이 끝나고 나선 또 한동안 우울했다.     


  대체 난 뭐가 문제지. 왜 나 혼자만 이래? 이번엔 확실한 답을 알아야겠다.

  난 미친 듯이 파고들었다.      


  언제 화가 나지? 언제 우울하지? 난 어떤 사람이기에 도대체 이러지? 책도 읽고 유튜브도 보면서 심리, 상담, 가족관계 등의 키워드에 잔뜩 몰입했다. 그러던 중 한 키워드가 내 레이더망에 잡혔다. 성인 ADHD...? 이번엔 정말 답을 찾은 건가? 책 '젊은 ADHD의 슬픔'도 사서 읽었다. 그냥 너무 내 이야기인데? 나도 검사를 받으러 가야 하나? 간이 테스트를 했다. 18점 이상이고 점수가 높을수록 ADHD 의심 수준이 높아진다고 했는데, 나는 48점이 나왔다. 이거 뭐지...? 남편이 맨날 나랑 똑같다고 말하는, 길 가다 춤추고 노래 부르고 시도 때도 없이 흥얼거리는 남편 친구에게 테스트 해 보라고 링크를 보냈다. 오 나의 동지-는 12점이 나왔다. 심지어 남편보다도 낮았다. 응? 충격에 시공간이 멈춰버렸다. 나 진짜 검사받으러 가 봐야 하나...? 이거 치료는 다 약물로 한다는데, 유전이라는데. 그럼, 우리 집이... 문제인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친구에게 전화해서 물었다. 마침 이사를 준비하던 친구의 오랜 한탄을 들어주다 머뭇머뭇 말했다. "나 ADHD 같니?"

  친구는 단호하게 뭐래.ㅋ 를 쏴주고 이사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친구 이야기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아니, 왜 내 이야기 들어보지도 않고 아니래. 한번 생각해봐- 난 계속 말했지만, 고등학생 때 친구가 본 나는 아주 멀쩡했다고 했다. 수업시간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잘 놀고.

  오랫동안 봐온 친구가 아니라면 아닌가 보다고 안도를 해야 하는데, 내 안의 불안이 다시금 널뛰고 있었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지? 근데 난 왜 그래? 힘들게 찾은 답이라 생각했는데 이것도 아니야? 근데 쟤 반응은 왜 저래? 나 또 엄살이야? 누군가에게는 내 고민이 패션 ADHD 정도로 보이는 걸까? 와, 미쳐버리겠네. 이거 억울해서라도 진짜, 검사를 받으러 가야 하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검사 받으러 가지 않았다. 그러니 진실은 모른다.     


  내 안의 문제가 분노조절장애일까, 우울증일까, 아니면 진짜 ADHD일까. 난 답을 찾아야 내 안의 복잡한 미로가 끝이 날 것 같았다. 답을 알아야 해결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세상엔 답을 알고 있다고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사회복지 일을 하는 친구가 말해줬다. 때론 몰라야 될 때도 있고, 몰두하지 않아도 되는 일도 있다고. 알려고 해봤자 어차피 모를 거 그냥 신경 쓰지 말고 살라고 했다.

  맞아. 삶의 의미를 계속해서 찾고 찾다 보면 그 끝은 죽음이라고 했던 것 같다. 말 그대로 죽음을 코앞에 두게 될 순간, 그땐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되고 찾게 될 것이다.     


  애 키우는 친구가 그랬다. 아기 키우면서 얘가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배웠지- 하는 순간들이 많다고. 물음표를 잔뜩 머리 위에 띄우고 있는 친구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친정엄마가 그랬다고 했다. “조상이 안 한 짓은 안 한다.”     


  남 탓을 하다 하다 못해서 이젠 내 탓으로 화살이 돌아와 이 지경인 거면, 나는 차라리 확실하게 남 탓을 해버리기로 결심했다. 나도 내 조상이 안 한 짓은 안 했을 것이다. 하물며 나조차도 손가락질하는 못난 내 모습도 다 조상이 한 짓일 것이다. 그러니 이건 다 조상 탓이다. 나는 할 만치 했고, 충분히 애썼다.      

  엄마는 '또또, 잘 되면 지 탓, 잘 못 되면 부모 탓 한다'고 하겠지만 뭐 어때. 이럴 때 가족끼리 좀 도우며 삽시다. 네? 이게 다 엄마 아빠 탓이야, 할머니 할아버지 탓이야. 아 몰라 그냥 김씨 일가 내 조상들, 어르신들 탓이야. 조상님들 때문에 손녀 자식이 너무 힘들어요!      


  생겨 먹은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오롯이 받아들이며 살 거다.

  이제 나는, 나를 좀 먹는 내 탓은 안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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