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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빨강 Oct 15. 2021

# 웃지 말아야 할 때는 절대로 웃지 마

  난 좋고 싫음이 명확하고 그게 티가 나는 사람이라, 누군가와 친한 것이 오픈되었을 때 좋지 않은 결과도 있었다. 방송국을 그만둘 때 감독님들이 열어주신 뒷풀이 자리에 날 엄청나게 괴롭히고 꼽 주던 작가 언니가 쌩뚱맞게 합류해 말한 적이 있었다.

  “내가 빨강이 널 왜 괴롭혔는지 아니? 너는 J작가 언니에겐 엄청나게 잘했잖아. 근데 왜 나한테는 그렇게 안 대해줬어? 그게 미워서 너 괴롭혔던 거야.”

  화해의 손길인지, 자기 맘 편하자고 하는 합리화인지 무언지 모르겠지만 회사생활에서 들은 그런 류의 이야기는 받아들이려 애쓰는 편이었다. 많은 사회인들이 전수하는 회사생활 꿀팁처럼, 회사에서 사적인 이야기는 안 하는 게 맞았다. 그래도 맘 맞는 사람은 얼마든지 회사에서도 만날 수 있고, 속내를 공유할 순 있지. 하지만 이 과정은 매우 신중해야 무엇보다 내가 안전하다. 특히나 공적인 자리에서는 티를 내지 않는 것이 나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나 좀 편하자고 꼽 언니 같은 사람과 친해지느냐? 친한 척이라도 해? 아니, 난 더 조심하고 더 티를 안 내고, 더 참아내는 방식을 택했다. 꼽 언니는 이제 안 보면 그만이지 뭐.


  어느 순간 나는 화가 잔뜩 났지만, 화를 내는 법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화는 늘 참고 참다가 이상한 타이밍에 폭발하려 했다. 제대로 정당하게 화를 내는 법을 모르니, 꾹꾹 억눌러있던 감정이 마치 빵빵한 풍선이 갑자기 터지듯, 이상한 상황과 타이밍에 뻥 하고 터지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분출된 화는 정당하지도 않았고, 나를 개운하게 해주지도 않았다. 무례하고 실례를 범한 것처럼만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아 참고 참다 혼자서 조용히 터트렸다. 사실은 터트리는 법도 몰랐다. 그냥 주구장창 퇴근길에서부터 저녁밥을 해 먹으면서, 게임을 하면서도 곁에 있는 사람에게 불만과 힘듦만 우다다다 쏟아내고 있었다. 아무리 나 힘든 게 정당하고 옳더라도, 그것도 길어지면 폭력이다.


  남편과 연애할 때 PC방에 간 적이 있었다. 옆에서 한 외국인이 신나게 디스코드를 하느라 한껏 목청을 올려 떠들고 있었다. 헤드셋을 끼고 있는데도 내 디스코드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 한번 참고 두 번 참고, 하 이젠 못 참겠다- 하는데 남자친구는 바로 그 사람의 어깨를 툭툭 쳤다. 조용히 해주세요, 플리즈.

  짧고 단호하고, 무엇보다 매우 정중했다. 쏘리-와 함께 바로 평온해졌다. 나였으면, 한참을 참고 참다가 헤이헤이헤이! 알 유 크레이지이?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화의 임계치가 높은 게 좋은 것만은 아니란 걸 깨달았다. 

  마감 시간에 임박해 빕스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좀 남은 줄 알았는데, 우리를 우선 앉히고서야 직원은 말했다. 마지막 오더가 30분 남았고 정리 중이니 필요하신 것 있으면 미리 알려달라고. 이제 앉아서 짐 풀었고, 아직 한 바퀴도 안 돌았는데 이게 말인가? 기분이 나쁜데 차라리 나가는 게 낫지 않나 고민하는데 남편은 직원에게 물었다. 따뜻한 음식이 뭐가 있냐고 물었고, 직원이 말한 것 중 파스타 2개 정도는 새로 조리해서 가져다 달라고 했다. 직원은 어엇 일이 귀찮아졌다-는 표정이었지만, 안 해줄 수가 없었다. 따뜻한 음식은 이미 다 식어있거나 비어있거나 했으니까. 그마저도 안 해주면 우린 돈 내고도 먹을 게 하나도 없었다.

  내 눈엔 남자친구가 백마 탄 왕자님처럼 보였다. 한 손엔 바늘을 꼭 쥐고 있는. 정확하게 지금이야-를 알려주며 내 화 풍선을 귀여운 수준에서 빵빵 터트려줄, 그런 백마 탄 왕자님. 


  난 이제 어른이 되어서 잘 참는 법을 배웠으니, 회사생활도 사회생활도 잘하고 있는 줄 착각했다. 내 자신이 성격 좋은 사람이 된 줄 착각했다. 화는 어디까지 참을 수 있나 두고 보자-로 무작정 참아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량처럼 맥주 몇 잔, 소주 몇 병- 정도의 범주로 카운트하는 게 아니었다.

  이 상황 어떻게 생각해, 내가 기분 나쁜 거 맞지? 라고 주변인들에게 물어보고, 그들이 맞다고 동의해줘야 내 화가 이유가 있고 정당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때론 내가 잘못한 상황인데도 내 기분이 억울하고 화가 날 수도 있지. 이미 다른 데서도 실수했다고 실컷 깨지고 왔는데 왜 너는 실수했으니까 그건 니가 기분 나빠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게 늘 내 자신이었던거지. 왜 난 스스로를 위로 못 해줘? 내가 떳떳한 상황이 아니면 '화'라는 감정을 느껴서도 안 되는 거야?


  웃지 않아야 할 상황에서는 억지로 괜찮은 척, 웃어넘겨야 될 게 아니었다. 지금 억지 미소를 짓는 데 에너지를 쓰다가 정작 정말로 참고 넘겨야 할 때 에너지가 없어 터져버리면 안 되는 거였다. 


  화가 터지는 순간을 만드는 건 외부의 적들이 아니었다.      

  결국 내 자신을 지키는 건, 왕자님이 아니라 내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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