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되는 일은 애쓰지 않아도 다 되게 되어 있어
지역에 있는 학교에 행정직을 검색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언제까지고 징징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남자친구가 공부하는 학교에 하프타임 행정직이 있었다. 시간대가 괜찮아 지원 해야겠다 생각하며 더 둘러보고 있었다. 같은 곳에서 연구원도 뽑는데, 공간을 활용해 문화행사를 기획하는 기획 직군이었다. 기존에 하던 일과 겹쳐 보여 신기해서 읽어내려가는데, 어라, 자격요건에 석박 관련 기재가 안 되어있네? 게다가 이 연구주제는 뭐지?
이러저러함을 이야기하면서 나 여기에 연구원으로 지원해 볼까 한다고 말했다. 기재가 안 되어있어도 당연히 연구원은 안 될 거라고 남자친구는 딱 잘라 말했다. 우쒸-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 생각도 그와 같았고 나도 처음엔 행정직 지원서를 받아 작성하려 했다. 하지만,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그쪽으로는 해본 적이 없고 아는 것이 없었으니까. 컴퓨터 앞에서 하얀 화면만 띄워놓고 한참을 고민하다, 연구원 지원서를 작성했다. 금방 끝났다. 쓰다 보니 애정도도 커졌다. 그대로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난 양식대로 써서 지원했고, 나 같은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면 저쪽에서 알아서 거르겠지 뭐.
며칠 뒤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화가 왔다. 그제서야 지원 사실을 집에 알렸다. 붙으면 거기 먼데 거기까지 출퇴근은 어떻게 하냐고 걱정하는 엄마를 집에 두고 나오면서 예전 생각이 나서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 몰라 일단 가보자-하고 들어갔다. 영어 회화 능통자라는 옵션을 보긴 했지만 큰 준비를 하진 못했는데, 면접장에 들어가자마자 영어질문이 폭격으로 쏟아졌다. 4년 동안 한국어로도 사람들과 대화를 못하고 살았는데 갑자기 영어라고? 곧 실무적인 질문들은 한국말로 이어졌다. 아 다행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잘 말하고 있는 게 맞나? 이제는 사회생활을 했던 것보다 혼자 독서실에 처박혀 공부하던 기간이 더 길어서 마치 처음으로 취직 면접을 보는 기분이었다. 아무런 감도 없었다.
나는 너무 중언부언했다는 생각에 망쳤다고 생각했고 편의점에서 핫바를 오물오물 사 물고 가면서 엄마와 남자친구에게 돌아가며 전화를 하며 면접은 망쳤다고 했다. 엄마는 늘 그렇듯 별말 없이 “어, 그래”. 남자친구는 “이거 희망이 보이는데?”
또 다른 며칠 뒤 합격 전화가 왔고, 언제 날짜부터 나와 달라고 했다. 몇 년 골방에서 혼자 썩었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죽지 않았고 이렇게 언제라도 다시 사회에 속한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엄마는 아침마다 카카오 지도앱을 켜서 버스 시간을 체크 하며, 몇 시에 오는 이 버스를 타면 9시 전까지는 도착할 수 있다는 걸 알려줬다. 처음엔 연구원은 안 될 거라던 남자친구는 이제 신이 나서 학교에서 같이 저녁이라도 먹을 수 있겠다며 방방 뛰었다. 아빠만 침울했다. “공부도 다 때가 있는데, 아빠가 밀어줄 수 있을 때 쭉 이어서 더 하면 안 되겠냐?”
내 돈으로 돈 벌면서 공부 꼭 할게. 꼭 붙을게. 하던 거 꾸준히 놓지 않고 할게. 걱정마. 아빠-라고 말하면서 다짐했다. 자신은 없었다. 4년 동안 전업으로 하던 걸 일하면서 병행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아빠에게 말을 하면서 다짐했다. 끈을 놓지 말아야겠다고, 계속해서 끝을 보겠다고 계속 다짐했다.
그렇게 남몰래 두 번의 도전을 더 했고, 실패했다.
올해 같은 경우에는 이젠 그만 애쓰라고 알려주듯 꽤나 큰 점수 차가 났다. 한동안 정말로 많이 우울했다. 어떻게 보면 심리상담을 받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내 신변에 여러 변화가 있었다. 순서대로라면 일하는 곳과 집이 너무 멀어 학교 기숙사로 들어간 것이 먼저고, 그 뒤로는 남자친구와 결혼해 지금의 신혼집으로 이사를 해서 완전히 부모에게 독립을 한 것이다.
결혼할 때는 기분이 묘했다. 콕 집어 이 사람이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결혼 과정은 일도 많고 주변 케이스들을 봐도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던 과정으로 기억하는데, 하물며 몇 년 악을 쓰며 준비하던 이직도 시험도 안 됐는데, 우리의 결혼 과정은 마치 하늘에서 점지라도 해준 듯이 모든 것이 너무 술술 잘 풀렸다. 유일한 반대는 남자친구가 키우던 고양이 두마리였고, 어쨌든 고양이는 귀여우니까 어찌저찌 잘 넘어갔다. "더 키우는 건 안 된다."
양쪽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얼마 안 돼 엄마가 날을 받아온 것을 시작으로(이렇게 갑자기?), 식장을 한 달 만에 잡았다. 우리가 살 집은 운명같이, 발품 판 지 3일 만(?)에 만났다.
너무 모든 게 다 술술 잘 풀려버리니, 기존에 잡아둔 상견례 날짜가 오히려 너무 뒷날 같았다. 아침드라마에서 볼 법한 ‘이런 집에 우리딸/아들은 보낼 수 없습니다! 이 결혼은 반대야!’ 같은 일만 상견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당연히 그런 일은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았다. 괜히 동생이 울적해져서, 누나 시집보내는 자리라서 그런가 평소보다 나약해 보이는 아빠의 모습이 맘에 걸린다고 한 것 빼고.
공부하느라 조용히 숨어 살던 애가 학교에서 일한다는 소식도 몰랐는데 갑자기 결혼한다고 청첩장을 들고 나타나니, 간만에 연락한 지인들은 내가 속도위반이라도 한 줄 알았다고 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런 것 아니고오 “그럼 갑자기 왜 결혼이야?”, “나도 왜 이렇게까지 갑자기인지는 몰라. 우리 엄마가 그렇게 날을 잡아 왔어...”
엄마가 잡아 온 날이 2개가 있었는데, 둘 중 고민하다 빠른 4월로 결정했다. 처음 결혼 준비를 시작할 때가 11월이었다. 코로나가 한참 심각해지고 있을 때였고, 우리가 결혼하게 될 4월은 그야말로 절정이었다. 우리 빼고 다 미뤘다. 주변에서도 너네 빼고 다 미뤘다고 했다. 그치만 이미 우린 신혼집에 들어와 같이 살고 있는걸, 미루면 확실히 괜찮아지나? 식을 미루면 코로나 때문에 못 온다는 사람들도 다 올 수 있나?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우린 그대로 강행했다.
결혼식 당일, 이상한 데서 감동을 받았다.
신부 입장을 하는 순간에 문이 열리는 타이밍. 핀 조명이 떨어지는 타이밍. 버진로드로 들어가자마자 연주되는 현악 3중주의 연주 시작 지점 그리고 연주 종료 지점. 커튼이 열리는 타이밍. 축가가 올라오는 타이밍. 영상이 플레이되는 시점.
며칠 전에 식장에 메일인가 전화로인가로 딱 한 번 이야기한 게 전부였다. 어떤 건 내가 콕 찝어 말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당일 크로스체크도 없었고, 리허설을 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르지만, 난 샵 갔다 온 고대로 신부대기실에 콕 박혀있었다. 코로나라 사람은 정말로 많이 없었지만 다른 신부들이 느끼는 것처럼 나도 나름 정신이 없었다. 이것저것 뛰어다니면서 확인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아빠와 팔짱을 끼고 닫힌 문 뒤에 서 있었다.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사회자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라, 남편은 언제 갔지, 혼자 잘 서 있나? 입장곡 확인은 했나? 사람들은 다 앉아 있나? 축가 부르는 애들 준비는? 음원은 잘 챙긴 거 맞나? 결혼식 망하면 어떡해? 별의별 걱정을 하는데 문이 열리고, 이끌리는 대로 입장을 하는데, 정말이지. 전부, 모든 것이 너무너무 완벽하게 준비되었고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주인공으로 입장하는 건 나고, 이 순간을 내가 이래라저래라 뛰어다니면서 진두지휘하지 않아도, 이렇게 물 흐르듯 잘 진행되고 있구나. 일이 제대로 잘 흘러간다는 건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거구나... 결혼을 하는 그 순간에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결혼을 하다니, 우리가 이렇게 가족이 되다니... 그저 모든 것이 빛 같았고 기적 같았다.
여태까지 내가 살아온 짧은 인생은, 절대로 내가 결정하고 계획한 대로 살아지지 않았다. 그치만 정말로 신기하게도, 될 일은 애쓰지 않아도 되더라. 정신 차려보니 식장이었고, 정신 차려보니 신혼여행을 가고 있는 비행기 안이었던 그때의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