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시생 4년은 블랙홀 같았다. 하루하루 열심히 산 기억만 있다. 가장 열심히 살았던 해의 기억으로는, 아침 7시 기상, 운동 한 시간을 시작으로 쭉 공부만 하면서 스톱워치 열 시간 열두 시간을 주 5일씩 찍으며 살았다. 그래서 몇 년의 기억이 통으로 없다. 날씨가 바뀌면 시험이 다가오는구나, 또 날씨가 바뀌면 다시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구나- 그렇게 살다 보니 시간이 그냥 다 사라졌다. 점심은 도시락, 저녁은 집. 뭐가 먹고 싶은지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하는 메뉴 고민도 다 낭비 같았다. 그냥 있는 대로 먹었다. 엄마가 싸주는 대로 엄마가 해주는 대로.
한 번쯤은 이렇게 살아보는 기회를 갖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라는 사람을 기계로 쳤을 때, 어떤 컨디션에서 어떻게 운용을 해야 최고의 능력치를 뽑아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아침에 독서실로 출근해, 깜깜한 독서실 안 스포트라이트처럼 내 자리에 조명을 밝히고 나면, 의식을 치르는 기분으로 텀블러에 커피를 타고 생수통에 물을 가득 채워 자리에 앉으며 박카스를 깠다. 화장실을 가는 것 이외에 최대한 일어날 일이 없어야 내가 딴짓을 안 했다. 실수로라도 한번 멘탈을 놓으면 다 놔버리게 될까 봐 문제 푸는 것도 기계적으로 습관화시키려고, 시험 시간대로 오전엔 국어, 영어, 한국사 같은 기본 교양을 돌리고, 오후에는 5법을 돌렸다. 처음엔 월화수목금 5일에 맞춰 순서대로 민법, 민사소송법, 형법, 형사소송법, 헌법 이렇게 하루에 한 과목씩 공부하려 했지만, 법 베이스가 전혀 없는 채로는 계획은커녕 강의표에 나와 있는 강의의 진도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허덕거렸다. 인지하지 못했는데,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있더라. 그래서 망하면 다시, 다시 제대로- 이런 버릇이 있었는데, 그랬다가는 1회독도 못하고 시험장에 들어갈 것 같았다. 공부량이 많은 과목을 공부할 때는 그런 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이해가 되든 안 되든, 우선 덕지덕지 바르는 식으로라도 공부했던 것 같다. 이해가 안 되는 채로 넘어가는 게 납득이 안 갔지만, 일단 넘어갔다. 몇 회차를 얕게나마 돌리고 나니까 그제서야 이해가 안 되던 게 이해가 되더라. 그건 정말 신기했다. 그렇게 손에 잡히는 대로, 되는대로 했다. 대신 정말 꾸준히 했다. 아는 게 없으니 인강 선생님들이 시키는 대로 다 했다. 들으라는 것 듣고, 풀라는 것 풀고, 읽어보라는 것 읽어보고 반복했다. 덕분에 아슬아슬한 합격선 근접까지 간 적도 있다. 하지만 달력이 4번이나 바뀌는 동안 나는 여전히 공시생이었다.
공부하는 동안 나는 아주 예민했다. 그건 가까운 가족에게 더 심했다. 저녁 한 끼라도 같이 먹어주려고 앉아 있는 엄마 앞에서 책 봐야 하니 말 시키지 말라고 유난을 떨었다. 아빠가 카드 내역을 보고 "빨강이 만화방 갔네~" 한마디 했다고 버럭버럭 화를 냈다. '독서실 쉬는 날이라 하루종일 있을 곳이 필요했어요' 한마디면 되는 것을, 것도 부모에게 용돈 받아 쓰는 주제에 카드를 긁으면 가는 문자 내역이 나한테 와야 한다고 짜증을 냈다. 나였으면 자식이고 머고 진작에 여러 대 쥐어박았을 텐데 엄마 아빠는 묵묵히 이걸 다 들어줬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였지만, 고3 때 서울로 대학을 안 보내준다고 선전포고한 게 그렇게도 서러웠다는 말을 하도 입에 달고 살아서 그래, 밀어줄 때 실컷 한 풀고 공부해봐라- 라는 것도 있었다고 했다.
똑같은 말을 친구에게도 들은 적이 있었다. "너네 부모님은 너가 적당히 한 풀고 공부하다 결혼하길 바랄 거야. 진짜 합격이 목표는 아닐 수도 있어. 잘 생각해봐"라고 그 친구는 말했다. 뭐지? 이런 소리나 들으려고 내가 힘들게 이 친구 만나러 짬 내서 온 건가? 자기가 뭔데 우리 엄마가 그렇다고 생각해? 엄마에게 가서 물었다. "엄마는 정말로 그래?"
당연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진심으로 내가 합격하길 바랐다.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사람을 만나면 또 만나는 대로 힘든 점들이 있었다. 시험을 앞두고 있다고 분명히 여러 번 말했는데 자꾸 카톡을 보내고 모임을 만드는 친구. 시험 전날 굳이 응원을 한답시고 여러 통 전화를 하며 시간을 뺏는 친구. 근데 또 나 빼고 누구 결혼식장에서, 어떤 모임에서의 즐거운 장면들이 올라오는 sns의 사진들. 세상에서 나만 뒤처져있고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마다 나를 지켜주고 울타리가 되어주었던 것은 바로 엄마 아빠였다.
나는 시험공부를 하면서 엄마의 사랑을 왜곡 없이 진심으로 바라보게 됐다. 항상 내 앞길을 막는 것 같았고, 내 속마음은 들어보지도 않고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한다고 단언하며 지시하는 모습들. 속이 썩어 문드러질 것 같은 밤이 지나고 퉁퉁 부운 얼굴로 아침을 맞이 했을 때도 컨디션 괜찮니? 오늘 기분은 어때- 같은 말은 없고 "와서 밥 먹어라", "밥 먹어" 그놈의 밥, 밥, 밥.
지겨웠었다. 그놈의 밥. 대충 먹고 대충 때우면 되는 걸, 뭘 그리 애써서 차리고 애써서 먹이나. 차라리 따스한 말 한마디나 해주지, 기분이 어떻냐고 오늘은 어땠냐 같은 것들을 물어 봐주지. 밥 그거 대충 배고프면 밖에서 아무거나 사 먹고 때워도 되는 것을, 뭘 그리도 공을 들이고 지겹게 해먹이냐 싶었는데. 블랙홀 같은 4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를 지켜주고 중심을 잡아준 건, 바로 그 밥이었다. 엄마 밥.
4년 차 시험의 결과가 나온 날, 엄마는 도저히 이제는 못 밀어준다고 정 공부를 하고 싶으면 너가 아르바이트를 하든, 일을 하든, 스스로 돈을 벌면서 병행하라고 더 이상은 못 해주겠다고 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더... 애원을 해도 씨알도 안 먹혔다. 발표 당일에 이건 엄마가 너무 한 거 아니냐고 울면서 당시엔 남자친구였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자친구는 한참을 참고 참으며 듣고 있다가 내게 소리를 빽 질렀다.
"어른이면 어른답게 책임지며 살아야지!"
"어떻게 너까지 그렇게 말할 수 있어? 그런 식으로 말할 거면 우리 헤어져!"
"나랑 헤어지면 니가 시험에 붙을 거 같아? 남 탓 하지마! 앞으로 실패할 때마다 그런 식으로 살 거야?"
발표날이니까 부모도 터지지, 너만 터지냐? 그럼 부모는 대체 언제 화를 낼 수 있는데? 정말 니가 하고 싶은 거면 도움 없이도 해낼 방법을 찾아야지. 공부하는 동안 옆에서 다 받아준 사람한테 그게 무슨 짓이냐. 한번 쓰러질 때마다 세상 다 무너져서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아주 그냥 대사를 준비라도 해둔 것 같았다. 평소에, 본인도 쌓인 게 많았나?
수험생의 입장에서 나는 실패자였다. 4년의 세월을 시궁창에 갖다 쳐 박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4년의 기간 내내 정말 온전히 누구에게도 남 부끄럽지 않을 만큼 열심히 한 거 맞아? 열심히 했던 적도 있지, 그렇지만 4년 내내 오롯이 전부 다 열심히 그랬어? 그리고 그게 최선이었어?
수험생에게는 미역국 먹이지 말라는 것처럼 금기시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있는 애인 정리하지 말고 없던 애인 만들지 말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둘 다 했다. 그래서 남들이 볼 땐 놀 거 다 놀고 공부했다고 생각되는 걸까? 그렇지만, 살면서 저런 말을 저렇게 해주는 사람을 어떻게 안 만날 수가 있냐고.
남자친구는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대학원생이었다. 내가 좀 진정되는 것처럼 보이자, 한참을 사과한 뒤 학교 쪽 행정직이라도 하면서 공부와 병행하는 것을 추천했다. 나는 한참을 눈물콧물을 닦아내며 훌쩍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나는 앞도 뒤도 없이 이 시험에만 매진했고, 이 시험이 아니면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시험에 합격하지 않은 채로의 내 미래는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생각해 내야 했다. 나를 위해서도, 어느덧 내 가족만큼이나 소중해진 이 사람을 위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