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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빨강 Aug 16. 2022

# 소비요정의 탄생

'취향'은 '현명'이라는 단어와 양립할 수 없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돈이 생기면 그냥 홀랑홀랑 다 써버리는 아이였다. 친구들을 만나고 먹고 싶은 것을 사 먹고, 평소에 눈 여겨두었던 것, 사고 싶었던 것, 갖고 싶었던 것들을 한두 개 큰맘 먹고 사고 나면 어느새 지갑은 금세 원래의 가벼움을 되찾곤 했다. 그야말로 받는 족족 잔돈 10원까지 탈탈 털어 썼다.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 큰 금액을 저금하거나, 본인이 갖고 싶은 것들을 직접 모은 용돈으로 산다는 아이들은 일부 특이한 엄마 친구 딸래미나 아들래미 정도의 몇몇이라 생각했다. 어른이 되어 피땀흘려 직접 돈을 벌다 보면 달라진다고 했는데, 어째 나에게는 해당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훗날 나보다 더한 스케일의 소비요정이 된 동생은 이게 다 ‘엄마가 어렸을 때 갖고 싶었던 것을 사주지 않았던 탓이다’라고 주장하곤 했는데, 나도 그 의견에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 엄마가 뭘 안 먹이고 옷을 안 사 입히거나 했던 쪽은 전혀 아니다. 다만, ‘본인’이 원하는 것보단 엄마가 생각했을 때의 합리적이고 쓸만한 쪽의 물건들을 많이 권유하긴 했을 뿐.     


  소비와 관련된 어릴 때의 기억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이거다. 중학생이 되던 해였다. 친척 어른들로부터 생전 손에 쥐어본 적이 없는 큰 액수의 용돈을 받았다. 크다고 해도 백, 이백 정도가 아니고 일이십 만원 정도였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곧 중학생이 된다곤 하지만 여전히 초등학생 티가 풀풀 나는 꼬마에겐 꽤나 큰 금액이었다. 한 번에 그 정도의 금액이 수중에 현금으로 바로 들어온다는 것은 매우 큰 ‘사건’이었다.

  나는 사고 싶은 것이 있었다. 집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문구점으로 달려나가 매대 옆에 전시된 형형색깔의 펜 코너에 코를 박고 있었다. 말 그대로 코를 킁킁대며, 앞에 붙은 메모지에 직접 펜을 그어가며 색상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골랐다. 필기할 때 쓸 펜, 다이어리 쓸 때 쓸 펜, 언젠가 쓰고 싶은 특이한 색, 같은 색이라 해도 다른 브랜드의 펜에서는 왠지 없는 듯한 신기한 색감, 아, 이건 향기도 다른 것 같아(실제로 향기가 달랐다)- 등등의 이유로 나름 신중하게 선별한 것들이었다. 지금도 판매 중인 라떼 하면 다 아는 동아 미피 향기나는 중성펜 0.5mm 시리즈한 웅큼을 쥐어서 수중에 있는 돈의 절반 이상을 털었다. 당시 기억으로는 하이테크 같은 다른 일제 브랜드보다 개당 가격은 훨씬 저렴했는데, 어찌나 많이도 골랐는지 계산대에서 내가 지갑에서 꺼내야만 하는 지폐는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그 펜 하나가 뭐라고. 스스로 생각해도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 번쯤은 이렇게 사보고 싶었다. 그게 뭐라고, 갖고 싶었다. 그래서 용기내어 지불했다. 세상을 다 가진 듯이 행복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딸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는 듯한 엄마가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엄마는 내 손에 들린 봉투를 발견하곤 바로 뒤적뒤적 검사를 시작했고, 이내 이게 총 얼마냐고 물었다. 끝까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바로 모두 환불해 오라는 불호령을 내렸다. 나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맞섰다. 속으로는 할 말이 부글부글 끓어 넘쳤다. 이걸 내가 그냥 홧김에 샀다고 생각하는 건가,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하던 기회였는데, 하나하나 내가 얼마나 힘들게 고른 색인데, 개중 덜 쓸 것 같은 몇 개를 골라 환불하라는 것도 아니고 이걸 모두 환불하라고? 장난해? 나는 속으로 소리쳤고, 엄마는 소리로 호통쳤다. 반복되는 호통 속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아빠가 나섰다. 

  “이유가 있으니까 샀겠지, 이왕 산 것 쓰게 해주자.”


  아빠의 묵직한 말 한마디로 되찾아준 펜들과 그를 소유 하는데에 있어서의 ‘정당성’은 내 학창시절의 많은 부분을 지켜주었다. 나는 그 펜들로 친구들 앞에서 어깨가 으쓱해진 순간들이 많았다. 펜은 하이테크, 일제가 최고-라고 외치고 다니는 친구들 앞에서도 아니라고 이 색깔들을 한번 써보고 말해라-며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취향이 있었다. 필요할 때 맘껏 원하는 색을 골라 쓰는 맛으로, 다이어리도 편지도 많이 썼다. 친구들이 브랜드 신발을 샀네, 가방을 샀네- 자랑할 때에도 진심 어린 마음으로 ‘좋겠다’, ‘축하해’ 해 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나도 갖고 싶은 것을 가졌으니까. 

  시간이 지나 잘 안 쓰던 펜 몇 개는 잉크가 막혀 잘 안 나오기도 했고, 기억에도 없는 곳에서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래도 그 펜과 함께 하는 동안 학창시절의 나는 꽤나 오랫동안 행복했다.


  각자 시집 장가 다 가고, 이제는 예전처럼 엄마가 쉽게 손 못 대는 어른이 된 지금에야 엄마는 말한다. 요즘 애들처럼 너네들은 비싼 거 사달라고 말하지 않아서 좋았다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때의 아빠를 떠올린다. 그리고 다짐하는 것이다. 아빠가 내 행복을 지켜준 것처럼, 앞으로의 내 행복은 내 스스로가 지켜주자고.     


  소비는 값을 지불하고 정확히 그 값만큼의 베네핏을 돌려받는 단순한 플러스 마이너스 덧셈 만으로는 계산되지 않는 상호작용이다. 그래서 기업에선 엄청난 돈을 투자해서 마케팅을 하고 소비자로 하여금 관련된 이미지를 사고 싶도록 브랜딩한다. 쏟아지는 홍보와 마케팅의 홍수 반대편에선 그래서 어떤 물건을 사야하는지 '가성비'를 따져 물건별, 브랜드별 순위가 매려진 자료들로 정답을 내려준다. 그쯤되면 '가심비' 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나온다. 전자제품계의 에르메스, 비타민 계의 에르메스, 아니 언제부터 에르메스가 집집마다 하나씩은 다 있어야 하는 거였지.


  현명한 소비란 과연 무엇인가-만 두고 이야기 하면 이렇듯 밑도 끝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취향'은 '현명'이라는 단어와는 양립할 수 없는 단어라는 것.


  현명한 소비만을 반복하다보면 개인의 취향은 사라진다. 아이러니하게도 합리적인 소비를 반복하면 반복할 수록 개인의 행복과는 멀어지고 내 자신과는 멀어진다. 

  우리는 늘 이점을 더 경계해야만 한다. 

  N차 매진 임박을 외치는 홈쇼핑 문구보다, 집집마다 다 있다는 '국민템'이라는 문구보다, 이 구역 '가성비 갑' 문구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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