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마어마한 그녀
그 여자는 나보다 8살이 많았다. 그리고 일본 사람치고는 키가 엄청 컸다. 아니, 키만 큰 게 아니라 몸집 자체가 상당히 육중했다. 그리고 그런 체형에 걸맞지 않은 애니에 나올법한 목소리로 쫑알댔다. 할리우드의 문화를 좋아하고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사랑한다는 그녀는 8년 가까이 배우 매니지먼트 팀에 있다가 제작부에 온 지 얼마 안 된 참이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기존쎄인 그녀 앞에서, 그녀보다 나이가 어린 베테랑 계약사원들은 관계 포지셔닝에 상당히 고심했다. 나이나 고용형태의 차이는 기본이고, 이 선배의 업계 경력과 제작 능력이 비례하지 않아 더욱 애매했다. 은근슬쩍 반존대를 해가며 서로가 서로에게 호구 잡히지 않으려 계속해서 기싸움을 했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대놓고 깔볼 수 있는 존재, 그건 바로 나야 나. 쓰레기통에 봉투를 거는 방법부터 과자를 늘어놓는 순서까지 이건 뭐 저세상 시월드도 그녀의 잔소리를 따라갈 순 없을 것이다. 나는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지만, 그녀의 방식은 흡사 군대에서의 갈굼에 가까웠다. 갈굼을 위한 갈굼이랄까. 일당백의 다구리랄까. 그만큼 이 X은 분명히 나의 성장보다는 본인의 스트레스 해소에 더 포커스를 두고 있었다.
하루는 보리차 우리는 물통이 더러워졌다며 새로 사 오라고 하는 것이다. 연습실 근처에는 작은 편의점밖에 없어서 물통을 사려면 30분 정도 걸어 신주쿠 시내로 나가야 했다. 그쯤에나 가야 100엔 샵이라도 나온다. 그날은 유독 비바람이 거셌다. 급한 건 아니니, 내일 출근할 때 사서 오겠다고 하였다. 오늘 당장 마실 게 없는 것도 아니고 하루쯤 생수를 마신다고 해서 큰일 날 것은 아니니까. 근데 꼭 지금 가란다. 무조건 가서 사 오라고 앵앵대는 목소리로 쏘아대는데 더 이상 반항할 힘이 없어 우산을 손에 쥐고 연습실을 나왔다. 신입 연수 때 겪었던 비바람의 설움을 다시금 맛보며 100엔 샵에 도착했을 때, 우산뿐만 아니라 내 심신도 심하게 구겨졌다. 이대로 연습실 가지 말고 집으로 튀어...? 몇 번을 생각했다. 우리 엄마아빠가 이런 일이나 하라고 나를 귀하게 키워줬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 서러운 거다. 신입은 걸레짝같이 써야 제맛이라는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해 대는 업계에 잘못 발을 들였다 생각했다. 평소에도 그녀...ㄴ 는 내가 허겁지겁 도시락 먹는 그 잠깐의 순간조차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앙상블들에게 귀여운 막내취급받는 것도 거슬려했다. 센빠이~ 하며 콧소리 섞인 말투로 살갑게 다가오지 않는 내가 고까웠을 것이다.
그 와중에 회사가 마련한 멘티-멘토 제도 때문에 육중녀와 단둘이 한 달에 한번 식사자리를 가져야 하는 게 진심 최악이었다. 그래 까짓 거 차라리 서로 술 한잔 마시면서 털 수라도 있으면 좋은데, 맛있는 디저트 카페에 가자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운 사람을 눈앞에 놓고 달달한 디저트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원래 의도는 현장에서 몸 부대끼고 지내는 사수 외에 키다리 아저씨 같은 역할을 해주는 선배를 한 명 붙여주자는 거였는데, 키다리 아저씨가 아니라 키만 큰 아줌마가 붙어있으니 숨만 더 조여 오는 것 아닌가. 결국 인사팀에 클레임 아닌 클레임을 걸어 악몽을 끊어냈다. 그녀에게 멘티가 바뀌었다는 연락이 갔을 때의 어색함을 잊지 못한다.
이 시기에 나는 담배를 배웠고, 불안증과 불면증이 심해졌다. 밤에는 다음날 출근할 생각에 잠이 안 오니 알코올에 의존했고, 그렇게 취기에 몸을 맡겨 잠드니 다음날 멀쩡한 정신으로 일할 수 없었다. 늘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보며 지냈더니 목이 뻣뻣해지고 온몸이 경직되어 갔다. 때려야지만 폭력이 아니고, 대놓고 인격모독을 해야만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니다. 사회인이 되어가는 과정이겠거니, 성장통이겠거니 하며 넘기기에는 하루가 다르게 나의 멘털은 빠르게 꼬꾸라졌다. 8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한 달에 한번 정신과에 다니고 있으니 말 다했지. 이때의 경험으로 나는 신입들에게 절대로 쓴소리 하지 않는 선배를 모토로 일하고 있다. 사랑의 매랍시고 상대방이 원치 않는 채찍질을 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다. 냅다 팬다고 업무 효율이 오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힘들어하는 초년생들에게는 언제든지 도망가라고 조언한다. 왜냐면 나는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육중녀를 떠올리면 이를 바득바득 갈았기 때문에. 꽤 오랜 시간 누군가를 떠올리며 화병을 키우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다. 누군가가 자신을 갉아먹는 환경에 놓였다면 당장이라도 사회적 책임 따위는 던져버리고 도망치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유리멘털 청춘들이여 걱정 마세요, 그래도 저 지금은 잘 산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