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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 혼자 오래 살지 말아야지

베를린에서 새로고침 중

by 이나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 나이지만, 타지에서 일만 하고 사람들과 이렇다 할 교류가 없었던 나의 런던 생활은 퍼석하고 우울했다. 하루에 다섯 마디 이상 하는 날이 드물었다.


런던에서의 첫 몇 개월은 일과 집의 무한 반복이었다. 쉐어하우스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조리가 빠른 반조리 식품을 호다닥 전자레인지에 돌려 방으로 숨듯 돌아와, 책상에서 저녁을 먹으며 넷플릭스를 보다가 잠드는 생활이 이어졌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며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즈음, 호주 워홀 때 알고 지내던 J 언니가 런던으로 오게 되었다. 넓은 방은 아니었지만 일주일 정도 내 방에서 함께 지냈다. 집에서도 남은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느라 언니와 외출을 하진 못했지만, 퇴근 후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조잘조잘 이야기하며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지를 깨달았다. 그래서 일기에 이렇게 크게 적어두었다.


“혼자 오래 살지 말아야지.”



언니와 함께 지낸 일주일 동안 스크린타임은 줄어들었고, 처진 입꼬리는 조금씩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일상이 조금은 정상화되는 것을 보며 그래, 역시 인간은 집단동물이구나. 사람의 온기란 이렇게 따뜻한 거구나, 하는 짠내 나는 생각을 했다. 지금 떠올려도 마음이 좀 짠하다.


얼마 뒤, 언니와 나는 3개월간 함께 살 집을 얻어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집주인이었던 게이 커플이 멕시코로 아이를 입양하러 간 동안 우리에게 세를 내주었는데, 널찍하고 깔끔한 집에서 운 좋게 시세보다 저렴한 렌트로 호사스럽게 살 수 있었다. 후일담이지만, ‘젊은 한국 여성들은 깔끔하고 규칙을 잘 지킨다’는(?) 스테레오타입 덕분에 수많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집주인이 우리를 선택했다고 한다.


쾌적한 집도 좋았지만, 언니와 둘이 사는 것에는 더 많은 장점이 있었다


식재료를 공유할 사람이 있다.

좋은 일, 힘든 일을 매일 이야기할 수 있다.

각종 모험을 함께 할 사람이 생겼다.

김치, 청국장, 훠궈 등 냄새 걱정 없이 요리를 할 수 있다.

열쇠를 깜빡했을 때 문을 열어줄 사람이 있다.

집안일 품앗이를 할 수 있다.


쉐어하우스에서 살며 엉망이 된 식습관도 언니와 살면서 많이 개선되었다. 미식가이자 비건인 언니 덕분에 다양한 식물성 요리를 접하게 되었고, 꼭 고기 반찬이 있어야만 만족스러운 식사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 고구마를 오븐에 구워 시나몬 가루만 뿌려도 고급진 디저트가 된다는 것도 배웠다.

집밥.jpg 오매불망 기다리던 마라샹궈 데이

혼자 살던 그 시절은 일만 하고 쓰러져 자는 삶이었다면, 언니와 함께 살고 나서부터는 드디어 좀 ‘사람 사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삶에 균형도 잡히고, 일만 하다 보니 여기가 한국인가 영국인가 싶은 기분도 잦아들었다.


우리의 일상은 특별할 건 없었지만 불평할 것도 없었다. 집 근처 단골 카페에 주말마다 가서 바리스타의 커피 실력을 함께 평가하고, 체육센터에 맞춰 같이 요가 수업을 들으러 가고, 사워도우가 얼마나 오늘은 부풀었는지 이야기하며 호들갑을 떨고, 서로의 빨래가 마르면 대신 개어주고, 주말에는 뭘 해 먹을지 월요일부터 계획하고, 마트 전단지에 세일 상품을 표시해두고,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마중을 나와주는 평범하고 다정한 일상이 이어졌다.




마음이 맞는 사람과 같이 살다 보니 여러 방면에서 행동력이 크게 향상되기도 했다. 둘이 있다 보니 ‘할까 말까’ 망설이던 일도 좀 더 쉽게 도전할 수 있었다.


‘푸드 히어로’라고, 슈퍼나 식당에서 유통기한이 임박해 버려질 위기에 처한 음식을 대량으로 받아와 지역민들에게 나눠주는 활동이 있는데, 이것도 언니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함께 캐리어를 끌고 마트에 가서 음식을 받아와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일상의 소소한 낙이 되었다. 극내향인 나로서는 혼자였다면 상상도 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언니와 함께하니 크게 어렵지 않았다. 받아온 음식 인증 사진을 찍고,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덕담을 받는 것은 한 주의 낙이 되기도 했다.

IMG_1359_Original.jpg 푸드 히어로로 받아 온 유통기한 임박한 식품들

서울에서는 자전거 타는 걸 꽤 좋아했었는데, 런던 도착 3일 차에 자전거에 치였던 트라우마 때문에 도전하지 못하고 있던 나를 언니가 어미 사자처럼 이끌어 주었다. 덕분에 다시 자전거를 혼자 잘 타고 다니게 되었고, 행동 반경도 확장되었다. 버스비 내고 가기엔 아깝고, 걸어가기엔 먼 장소들 - 쇼디치 브릭레인, 해크니 힙스터 동네, 워털루 도서관도 주말마다 훌훌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언니와 함께했던 그 시절은 단순한 동거가 아니라, 잊고 있던 삶의 온기를 다시 깨닫게 해 준 시간이었다. 혼자서는 무너질 것 같던 일상도, 누군가와 나누면 훨씬 더 단단해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팍팍했던 내 런던 생활을 지켜봤던 언니는 새 집으로 이사하던 날, 앞으로는 꽃길만 걸으라며 꽃이 핀 선인장을 그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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