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일과 허경영이 망친 휴가
가족이 나와 절대로 휴가 가지 않는 이유
온 가족이 맘 편하게 휴가를 간 게 언제인가 싶다. 방송작가라는 직업은 언제 뭐가 터질지 모른다. 그래서 제대로 된 휴가를 계획한다는 건 무척 어렵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두 차례의 휴가 참사가 계기가 됐다. 2002년에는 여름휴가, 2007년은 겨울 휴가였다. 원인을 제공한 유명인들이 있었으니, 2002년 여름은 돌아가신 이주일 님이었고, 2007년 겨울은 허경영이 그랬다.(죄송하다. '님'자 붙이기가 좀 그래서)
2002년 여름 즈음에는 MBC <찾아라 맛있는TV>를 하면서 SBS의 아침 프로그램 <한선교 정은아의 좋은 아침>의 메인 작가도 하고 있었다. 매주 녹화해야 하는 위클리였기에 늘 시간에 쫓겼고, 여러 제작사의 경쟁이 치열했다.
위클리 프로그램을 하는 팀은 휴가철이 다가오면 이런저런 계획을 짜곤 하는데, 그래 봐야 뾰족한 수는 없다. 제작을 좀 바짝 해서 여유분을 비축하거나, 그도 아니면 팀원들이 한 사람씩 돌아가며 다녀오는 케이스다. 가장 심플한 건 이런저런 이유로 방송이 죽는 상황이다. 결방된다는 얘기다. 팀원 모두에게 일주일 가까운 여유가 동시에 주어지는 환상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문제는 죽는 회 차만큼 작가료(피디는 연출료)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
당시 나는 대략 3일에서 4일 정도 자리를 비울 수 있게 만들어 놓았던 것 같다. 2박 3일 일정으로 안면도 펜션을 잡았던 걸 보면 그렇다. 휴가 전 날까지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고, 당일 아침, 우리 네 식구는 차에 타고 출발했다. 일산에서 안면도까지는 대략 두어 시간 걸린다. 중간에 휴게소도 들르며 여유 있게 차를 몰았고 안면도로 막 진입을 했을 때였다. 제작사의 한 이사에게 전화가 왔다. 순간 안 받을까 살짝 고민했지만 뭔 일 있으랴 싶어 받았던 거로 기억한다.
"김 작가, 혹시 어디?"
"네? 휴가라서 안면도에 있는데요(방금 들어왔다고 하면 안 된다).
"......"
"뭔 일 있으세요?"
"이주일 씨가 돌아가셨어."
그가 폐암 투병 중이었다는 건 전 국민이 알았다. 돌아가셨구나.
"근데요?"
"좋은 아침에서 이주일 특집 생방을 하래. 우리가."
"언제요?"
"내일 아침."
어쩐지 순조롭다 했다. 그때 우리 가족 모두가, 아니 두 딸은 어렸기에 아내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우리는 차를 돌렸다. 막 들어온 안면도에서 눈물의 유턴을 했다. 온 가족이 다시 일산으로 향했다. 난 서울 도착하자마자 사무실로 갔고, 다음 날 아침 고 이주일 특집 한선교 정은아의 좋은 아침 생방송을 무사히 마쳤다. 무지 안 좋은 아침이었다.
세월이 흘러 2007년 겨울. 사람은 망각의 동물인지라 그해 12월에 다시 한번 온 가족이 휴가를 갈 수 있는 틈을 마련했다. 당시에는 KBS 2TV <감성매거진 행복한 오후>라는 생방송 매거진 프로그램을 했다. 왕영은 김홍성 아나운서가 MC였다. 나는 메인 작가를 하며 특히 스튜디오에 화제의 인물을 초대해 토크하는 코너를 맡고 있었는데, 당시 핫이슈 인물이던 허경영 경제공화당 총재를 섭외했다. 막 치렀던 대통령 선거 후보였고 온갖 기행과 공약으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던 사람이었다. 당시 많은 프로그램에서 그를 향한 섭외 전쟁이 치열했는데, 운이 좋았던 건지 모르겠지만 지상파 첫 출연이 내가 하던 프로그램 <행복한 오후>가 된 것이다.
난 허경영에 대한 모든 취재를 끝냈고 피디가 사전에 허경영을 만나 촬영도 했다. 제작을 서두른 탓인지 생방송까지 여유가 꽤 남게 되었다. 아싸. 그 시간이 내가 휴가를 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이 바닥에서는 갈 수 있는 여지만 생기면 바로 가야 한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거다.
방송작가협회를 통해 강원도 홍천 비발디파크에 2박 3일 일정으로 가기로 하고 추진했다. 그리고 첫날 무사히 비발디파크에 도착했고 아이들과 함께 워터파크에서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휴가 첫날이 저녁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때, 제작사의 팀장에게 연락이 왔다.
"김 작가, 혹시 어디?"
"강원도 홍천 비발디파크인데요."
"내일 녹화가 잡혔어."
"네? 녹화요?"
전말은 이랬다. 막상 허경영 총재가 생방송 출연한다 하니 KBS에서 불안해했고, 결국 제작사에 녹화로 진행하라는 연락(통보)이 온 것이었다. 스케줄 조정은 일사천리로 조정됐다. 난 가족과 논의를 했고, 결론은 나만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 혼자 강원도 홍천에서 서울로 가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갔다. 나머지 가족은 예정대로 2박 3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왔다.
허경영 총재는 녹화장에서도 빵빵 터졌다. 김홍성 아나운서에게 자기 눈을 바라보면 병이 낫는다고 했다. 영상에서는 산 자락을 뛰어 올라가는 모습이 나왔는데, 아무리 봐도 축지법 같지 않다는 성우의 내레이션이 나왔다. 만약 생방송을 했다면 과연 어떤 방송이 되었을까. 궁금하다.
이렇게 두 번의 금쪽같은 휴가가 참사가 된 후, 우리 가족은 다시는 나를 염두에 두고 휴가 계획을 잡지 않는다. 일단 나를 빼고 잡은 다음, 내가 오게 되면 합류하는, 나는 휴가 옵션이 되었다.
슬슬 여름이 다가온다. 올여름은 또 어떻게 풀려갈 건지... 나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