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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주 작가 Dec 22. 2020

PD수첩

작가는 매주 좌절한다

MBC 아카데미 1기 취업 1호로 들어간 곳은 MBC <PD수첩>이었습니다. 1992년이 시작할 즈음이었고요. 제가 참 좋아했던 몇 안 되는 프로그램 중 하나였죠.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잠실 신천의 방송 아카데미를 다니며 <PD수첩>의 시청자였던 내가,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그 프로그램의 당당한 구성원이 된 겁니다.


저는 자료조사라고도 했고 막내 작가라고도 불렸습니다. 선배 작가들 중에 두 사람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제작사 대표를 하고 있는 여자 작가(이름을 까먹었네요) 한 분, 강인한 비주얼과 화통한 성격의 남자 작가인 강문모 형. 문모 선배는 <PD수첩>을 3, 4년 정도 하다 1995년 케이블방송 시대가 열리면서 매일경제TV로 들어갑니다. 작가가 아닌 피디로요. 그 얘기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하겠습니다.


지금의 <PD수첩>은 아마 메인 작가들이 꽤 있고 막내 작가에 리서처들이 있습니다. 대략 7~8팀으로 돌아갈 겁니다. 각 팀에는 메인 작가와 서브 작가가 있고요. 1992년에는 훨씬 단출했습니다. 메인 작가는 서너 명 정도였던 거로 기억합니다. 저 같은 막내 작가도 거의 한두 명이었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에 웬 작가들이 있냐고요. 아이템을 선정하고 섭외하고 구성하는 전반적인 일들을 작가가 하거든요. <PD수첩>은 취재한 피디들이 스튜디오에 직접 출연하여 역시 피디인 메인 진행자와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꽤나 어색해서 인상적인 프로그램입니다. 그 대사들을 생각하고 대본으로 만드는 일도 작가의 업무입니다. 기획부터 취재 섭외 구성에서 VCR(취재 영상) 내레이션과 녹화 대본 등까지 해야 하는 이들이 작가입니다.


작가는 심지어 연기를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저도 연기 데뷔를 <PD수첩>에서 했습니다. 야간에 방범순찰로 가장하여 행인에게 폭행을 하는 2인조 폭행범이라는 아이템을 다룰 때, 제가 폭행범 1을 했습니다. 제 친구 현태를 꼬셔서 폭행범 2를 맡겼고요. 일일이 기억할 수 없는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고요, 전화를 하는 뒷모습이라는 고도의 내면 연기가 요구되는 피팅 모델도 했습니다. 아마도 그때 쌓인 연기 내공이 1년 뒤 예능 작가로 변신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작가들은 매주 좌절한다.


문모 선배와 순민 선배(<여론광장> 메인 작가)와 제가 여의도 MBC 4층 교양제작국 구석에 모여 나누던 말들입니다. 당시에는 사무실이든 휴게실이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흡연이 가능했습니다. 저도 헤비 스모커였고요. 줄담배를 피우며 격론을 벌였고 울분을 토했습니다. 왜냐고요? 작가들이 서치 해서 던지는 아이템들이 매주 까였기 때문입니다. 저야 막내니까 보조하는 정도였지만 선배 작가는 매주 힘들어했습니다. 본질을 파고드는 아이템을 회피한다고요. 말로만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프로그램이고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고요. 구체적으로 어떤 아이템들이 그 선배를 특히 매주 좌절에 빠지게 했는지는 희미하지만 당시 그곳에 모여 울고 웃던 그림들은 선명합니다.


김상옥 앵커, 송일준 피디, 김세영, 최진용, 백종문, 노혁진, 조능희, 채환규 등 지금은 국장, 본부장, 사장급들인 분들이 90년대 <PD수첩>의 인기를 가능하게 한 피디들입니다. 물론 화면 밖에서 함께 한 작가들이 있었고요.


<PD수첩>은 이른바 우리 언론계에서 ‘PD저널리즘’이라는 조류를 처음 만들어 낸 한 획을 그은 프로그램입니다. 물론 1991년 12월 9일 개국한 민영방송 sbs에서 <그것이 알고 싶다>도 피디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만든 프로그램이었지만 문성근 배우의 카리스마에 피디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PD수첩>은 문성근 같이 생긴 피디들이 전면에 나섰고요. 1990년 5월 8일 태어났습니다. 비록 전두환의 친구 노태우가 아직은 대통령이었지만, 1987을 통해 직선제로 뽑은 대통령이었기에 민주화의 흐름은 피할 수 없던 시기라 탄생할 수 있었던 프로그램이지요.


제가 방송작가로서 입문을 하고 구성의 ABC를 조금이나마 배운 <PD수첩>을 저는 1년 남짓 하고 그만 둡니다. 예능작가에 도전을 하죠. 그 얘기는 좀 쉬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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