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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주 작가 Dec 23. 2020

자막 유감

‘말 자막’만이라도 제발!

여러분은 방송 자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좀 더 명확하게 얘기하면, 한국의 TV 방송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는 ‘말 자막(출연자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쓴 것)’이나 ‘상황 혹은 재미 자막(정보를 알려주거나 재미를 위해 제작진의 의도로 넣는 것)’ 등을 말합니다.


언젠가부터 방송 프로그램을 볼 때 자막이 없으면 허전하고 심심하다는 얘기가 들려왔습니다. 특히 예능 프로그램에서 더욱 그랬죠. 사실 자막 관련해서 예능 프로그램은 조금은 논외로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예능 프로그램의 목적이 시청자에게 웃음과 재미를 주는 거니까 자막으로 뭔 짓을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겠죠.


반면 다큐멘터리나 정보, 토크 등을 주로 하는 교양 유형의 프로그램은 현재의 자막 문화는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 방송에 나와서 한국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하는 말마다 말 자막을 표시하는 건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장소에서 하는 건지 알려줘야 할 때 사용하는 ‘장소 자막’이나 출연자의 이름과 나이 등을 알려주는 ‘네임 자막’ 그리고 화면에서 보이는 것들에 대한 정보를 알려줘야 할 필요가 있을 때 넣는 ‘정보 자막’ 같은 건 문제없습니다. 그런 자막들은 정확하게, 시의적절하게 제대로 들어가야겠죠. 교양 프로그램에서 제가 물음표를 던지는 건 주로 말 자막입니다.


현재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서 넣고 있는 말 자막, 이유는 뭘까요? 제가 현업 방송작가이긴 하지만 혹시나 해서 검색을 해봤습니다. 이유를 찾아보려고요. 그런데 이렇다 할 근거나 이유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볼 땐 이렇습니다. 출연자의 오디오에 문제가 있는 경우입니다. 잘 안 들리거나 분명치 않을 경우죠. 또 청각장애인을 위한 배려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또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그저 관례가 됐다는 거 이외에 명확한 근거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말 자막을 넣는 건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요? 이 얘기는 비교적 제가 명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 방송작가로 일한 건 1992년이었습니다. MBC 시사교양 프로그램인 <PD수첩>이었죠. 지금도 하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이죠. 당시 제작과정을 떠올려보면 자막을 넣기는 했습니다. 이름, 장소 정도였죠. 지금의 기술과는 완전히 다른 슬라이드에 자막 작업을 해서 하나씩 하나씩 넣는 방식이었습니다. 슬라이드 뭉치들을 들고 왔다 갔다 했던 했지요.


<PD수첩>이야 시사교양 프로그램이니까 그랬다 치고 예능 프로그램은 다르지 않았겠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능도 자막이 거의 없었습니다. 출연자 이름이나 ‘장소 협조 민속촌’ 정도 넣었으니까 사실 자막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1993년부터 MBC 예능국에서 일했으니까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일밤>의 국민 코너 ‘몰래카메라’ 영상을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경규라는 네임도 들어가기나 했는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지금은 당연한 자막이 방송이 시작하면서 같이 넣기 시작했던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최초로 자막을 많이 넣기 시작한 건 언제였고 무슨 프로그램이었을까요? 누가 시작한 걸까요? 때는 1995년 어느 날, 장소는 여의도 MBC 3층 예능 프로그램 회의실, 사람은 <TV파크>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매일 아이디어 회의를 하던 몇몇의 피디와 작가들입니다. 주도를 한 이는 김영희 메인 피디였고요. 훗날 <느낌표>, <나는 가수다> 등을 만들었던 스타 프로듀서입니다. 저는 그 프로그램의 작가는 아니었고, 약 10미터 정도 떨어진 같은 공간에 있던 <일밤>의 회의 탁자에서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그래! 우리도 일본 프로처럼 말 자막을 넣어보는 거야!


그렇습니다. 일본이 주범입니다. 그렇게 이 땅의 자막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TV파크>는 김용만, 박미선 씨가 메인 MC였습니다. 뭐든 처음 시도하면 시행착오를 겪듯, 너무 과도하게 넣은 프로그램이기도 합니다. 진행자의 “안녕하세요”부터 클로징의 “안녕히 계세요”까지 모든 말을 자막으로 표현했습니다. 여하튼, 그렇게 시작된 방송의 자막은 오래지 않아 거의 모든 프로그램으로 퍼졌고, 2000년 중반 MBC <무한도전>에서는 자막이 ‘제7의 출연자’의 위치로 등극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말 자막은 기본이고 상황과 재미를 유발하는 온갖 자막들을 넣어야 하는 것이 기본이 된 것입니다. 오죽하면 자막 알바까지 생겼으니까요.


자막을 과도하게 넣는 건 어떤 문제를 야기할까요. 시청의 몰입을 방해합니다. 영상을 보고 그림을 봐야 하는데 자막이 쉴 새 없이 나와 신경을 쓰이게 합니다. 특히 말 자막으로 인한 방해는 엄청납니다. 출연자가 입을 열기 시작하자마자 아예 문장이 친절하게 공개가 되니까요.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하려는 찰나 확! 찬물을 끼얹는 거죠. 상황 혹은 재미 자막이라는 이름의 자막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이 영상에서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데 자막으로 다른 감정이나 생각을 유도하곤 합니다. 물론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막을 통해 큰 웃음 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도 한두 번이면 충분하다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시청 몰입을 방해하는 거 외에 영상을 참 지저분하게 만드는 게 또 자막입니다. 무슨 만화책을 보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예전에 왜 일본 방송에 자막이 그렇게 많은지 생각해본 적 있는데, 만화책의 영향이 아닐까 라는 저만의 결론을 내린 적 있습니다. 미국, 유럽의 방송은 현재도 자막이 없습니다. 세계에서 우리나라와 일본 방송만이 자막을 과도하게 사용한다는 얘기입니다.


과도한 자막에 관한 문제의식은 진즉부터 가져왔지만 이렇게 글까지 쓰게 된 데는 최근에 본 한 유튜브 영상 때문입니다. 미팅을 하는 10분 남짓한 영상이었고 예능에 가까왔습니다. 자막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절제한다는 느낌을 주는 자막 운용이 참 예뻤습니다. 영상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고 출연자들을 온전히 보게 했습니다. 그래서 잊고 있던 과다 자막에 대한 문제의식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이번에는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얘기하자는 뜻으로 끄적거려봤습니다.


무엇보다 지금도 자막들을 뽑아내느라 밤을 새우고 있을 수많은 동료 선후배 작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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