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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주 작가 Dec 27. 2020

휴거를 아십니까?

예능작가로 변신하라!

시사교양 작가에서 예능작가로 변신하기 위해 내가 우선 할 수 있는 건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1990년대에도 방송작가들이 일을 하는 경로는 인맥을 통한 연결이 많았다. 다만 당시에는 대략 격년으로 방송사에서 ‘코미디 작가 공개 모집’을 했지만 공고가 뜨기를 마냥 기다릴 순 없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미 예능국에서 일을 하는 작가 중 안면을 튼 선배가 있었다. 어떻게 가능했냐고?


1992년에는 그해 12월 31일에 지구가 망한다고 믿는 이들이 있었다. 다미선교회라는 교회였는데, 그곳을 중심으로 종말론을 믿는 사람들이 꽤 늘어나고 있었고 <PD수첩>에서 안 다룰 이유는 없었다.  그들은 1992년 12월 31일에 몸이 두둥실 하늘로 떠서 올라가는 이른바 ‘휴거’가 올 것이며 믿음이 있는 자신들이 그 혜택을 받으리라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의 재산을 교회에 아낌없이 퍼주었다. 그곳에서 숙식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차피 세상이 망할 거니까 물욕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어떤 아이템이든 취재의 기본은 자료조사. 그 방식은 신문이나 도서 등 활자를 통하는 것과 전화나 만남 등 사람을 통하는 길이 있다. 이 아이템의 경우 종말론에 흠뻑 빠진 신도를 만나는 게 가장 좋은 취재일 터, 다행히 그들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바로 MBC 사옥 안에.


휴거 신도는 자신들이 종말을 믿고 하늘로 올라갈 거라는 걸 전혀 숨기지 않았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출퇴근할 때 들고 다니는 가죽 가방 겉면에 글씨를 써놓았다. ‘1992년 12월 31일 휴거’ 하는 식으로. 그는 매우 인기 있는 어린이 프로그램의 피디였다. 근데 결정적으로! 예능국에는 <웃으면 복이 와요>의 작가 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취재를 위해 4층에서 3층으로 내려갈 줄은 몰랐다. 이름은 밝히지 않는 게 좋겠다. 가명으로 이훈지 형이라 하겠다. 그는 너무도 착한 사람이었다. 코미디 작가여서 그런지 언제나 웃고 있었고 자신의 일을 너무도 사랑하고 있음이 온몸에서 풀풀 드러났다. 회의를 할 때면 늘 큰 소리로 웃었고 키보드를 두드리면서도 키득키득 웃곤 했다. 자신이 쓰고 있는 코미디 대본이 스스로도 얼마나 웃기는지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작가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거의 모든 재산을 그 교회에 맡겼다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진심으로, 진정으로, 리얼리, 그해 말일 자신의 몸이 두둥실 하늘로 오를 것으로 확신했다. 한눈에 봐도 100kg 가까운 그 형이 정말 하늘로 오른다면 기적일 거라고, 난 은밀하게 생각했다.


궁금하실 거다. 그 형이 과연 어떻게 되었을지. 1992년 12월 31일이 지났고 늘 그래 왔듯이 새해 1993년이 왔다. 1월 1일을 쉬고 다음 날 예능국에 갔다. 그 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물론 약간 흥이 빠져 보이긴 했다. 내가 아는 체 하자 그는 호탕하면서도 조금은 씁쓸하게 웃었다.


영주야, 이번이 아니었대! 으하하하!!!


취재원의 인연으로 알게 된 그 형은 어느 날 나에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며 4층 종편실(종합편집실)로 데리고 갔다. <PD수첩>이 있는 4층에 있었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곳이었다. 따라 들어가니 딱 봐도 대장 피디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형, 얘가 지금 <PD수첩> 하고 있는 막내 작간데 예능 하고 싶대. 영주야, 인사해. 같이 하는 피디야.

안녕하세요. 김영주라고 합니다.

오, 그래, 예능 하고 싶다고? 언제 기회 되면 부를게.


그렇게 인사한 피디의 이름은 김영희. 훗날 <나는 가수다> 등 수많은 히트 프로그램을 만들고 진두지휘한 분이다.


이렇게 나는 조금씩 조금씩, 예능국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내가 예능 작가가 된 과정은 다른 경로를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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