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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주 작가 Dec 29. 2020

1993년, 예능작가가 되다.

드디어 4층에서 3층으로

여의도 MBC 사옥의 교양제작국이 있는 4층은 휴게실 쪽으로 오면 디귿자 형태로 난간이 있고 바로 아래 3층이 내려 보인다. 당시 중정이라 불렀던 꽤 넓은 공간을 매우 가깝게 볼 수 있는 구조다. 일주일에 한 번씩 좌절하며 선배 작가들과 담배를 피우면서 울분을 토하던 그곳에서 보였던 바로 아래층의 풍경은 지옥에서 훔쳐보곤 하는 천국이었다.


4층을 오가는 이들의 표정은 나라가 당장이라도 무너지지 않을까 고민하던 비주얼이었다면, 한층 아래에서 지나가거나 삼삼오오 모여 수다 떠는 이들의 풍경은 웃음, 폭소, 행복이라는 이름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운이 좋은 시간대에는 뛰어내려도 크게 다치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 개그맨 이경규, 황기순, 이홍렬 등이 웃으며 수다 떠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이러니 어찌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안 생겼겠는가. 틈만 나면 ‘3층맨’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런데! 간절한 마음이 통한 건가. MBC에서 코미디 작가 공채를 시행한다. 지금은 이런 전형을 찾아보기 힘든데 90년대에는 지상파 3사에서 2년 혹은 3년에 한 번 정도 예능작가를 공개 모집했다. 사실 말이 공채지 프리랜서를 좀 골라서 선발하는 것이다. KBS와 SBS는 어떤 방식이었는지 모르지만 MBC는 최종 선발된 작가들을 연수라는 명목으로 6개월 간 이 프로그램 저 프로그램을 돌리고 나면 프리랜서 작가로서 알아서 살 길을 찾아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작가지각자도생.


선발의 방식은 간단했다. 제시된 5개의 예능 프로그램 중 1개를 선택해서 1시간 분량의 대본을 써서 보내면 끝. 아마도 당시 MBC의 대표 예능 프로그램들인 <일요일일요일밤에(일밤)>, <토요일토요일은즐거워(토토즐)>, <우정의무대>, <오늘은좋은날> 정도였을 거다. 나는 큰 고민하지 않고 <일밤>을 선택했고 별다른 생각 없이 내가 <일밤>의 작가다, 생각하며 1시간 정도의 코너 구성을 해서 썼다. 아마도 당시에는 원고지에 작업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공모에 응한 내 작전은 이랬다. 합격이라도 하면 그야말로 ‘합법적으로’ 자연스럽게 4층에서 3층으로 가는 거고, 떨어지면 지난 번 취재를 인연으로 알게 된 휴거 작가 형한테 매달린다!


난 시험 운은 비교적 좋은 사람이었다. 대학교를 한 번에 가지 못했던 거 빼고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어지간한 시험 응시는 거의 합격했다. 그런 전차로, 1993년 시행된 MBC 코미디 작가 공개 모집에도 나는, 합격한다.


1993년부터 나는 예능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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