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94년 무렵은 내가 <일밤>의 작가를 하면서 홍대 거리를 처음 갔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른바 홍대 문화가 그때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곳으로 가자고 주도한 사람은 메인 피디 송창의였다.
송창의 피디라는 사람은 당시의 내가 볼 때 모든 걸 가진 사람이었다. 신의 직장이라 불리던 MBC에 다녔고, 즐거움과 웃음을 만들어내는 예능 피디였고 미남이었고 연예인과 매니저들이 그와 만나고 친해지기를 바랐다. 심지어 아내도 미스롯데 출신 방송인이었다. 게다가 잘 놀기까지 했다. 궁금했다. 나이도 꽤 많은 중년의 남자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사는 게 가능할까 늘 궁금했다. 보통 사람이 능력이 있으면 성격에 하자가 발견된다거나 사람이 좋으면 일에서 좀 떨어지거나 할 텐데 그는 아니었다. 일과 성격에서 두 가지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에이구 다들 어떻게 하면 웃겨 보겠다고 모인 사람들이잖아? 하하하 웃긴다 웃겨!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있는데, 조잘재잘 히히하하 내 아이디어가 좋아 아냐 그게 뭐가 웃겨하며 웃고 떠들고 괴로워하고 낑낑대는 피디와 작가들의 모습을 지긋이 지켜보던 그가 했던 말이다. 서로 아이디어를 고민하는 풍경이 그가 보기에 슬며시 미소가 나왔었나 보다.
그는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무엇보다 리액션이 탁월했다. 누군가의 아이디어가 웃기면 배꼽을 부여잡고 웃었다. 서세원이 <토크박스>라는 프로그램에서 바닥을 뒹굴며 웃었던 것과 비슷하다. 지저분한 회의실 바닥을 구르지야 못했지만 웃다가 의자에서 넘어진 적은 셀 수도 없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 힘을 주었고 그와 함께 작업하는 개그맨들은 일취월장했다.
송창의 피디와 비견되는 또 한 명의 피디는 주철환이다. 스타 피디다. 그와 일하면서 가장 많이 생각나는 건 자신이 낸 아이디어가 별 반응이 없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삐치며 일어나 나가면서 불을 끈다. 물론 웃자고 한 행동이다. 한마디로 순수하고 꾸밈없는 중년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대중들에게 피디로서 알려지게 한 프로그램들은 <퀴즈아카데미>, <우정의무대>이다. 단명에 그쳐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청년내각>이라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대학생들, 젊은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즐거워했다.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했고 대화를 즐겼다.
나는 <일밤>을 송창의 피디, 주철환 피디를 다 경험했는데 일하는 스타일은 전혀 다르다. 송창의 피디는 아이디어는 엉덩이에서 나온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모든 회의를 꼼꼼하게 작가들과 피디들과 개그맨들과 한 자리에서 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 종일 했고 어느 정도 나왔다 싶으면 다 같이 홍대로 가서 클럽에서 놀았다. 주철환 피디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아이디어와 구성은 작가와 후배 피디들에게 거의 일임했다. 그는 섭외를 하러 다녔다. 스타들을 명사들을. 그래서 <일밤>에 스타와 셀럽들이 줄줄이 나올 수 있었다.
송창의 피디는 MBC에서 나와 tvN이 개국할 무렵 그곳에서 진두지휘를 했다. tvN이 초기에 성인코드로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재정비를 하며 오늘의 tvN이라는 브랜드를 만드는데 일조했던 프로그램들, <막돼먹은 영애씨>, <롤러코스터>, <푸른거탑>, <택시> 등이 그의 지휘에서 나왔다. KBS에서 이적해온 예능 피디 신원호에게 드라마를 만들어보라고 제안한 사람도 그였다. 그렇게 해서 <응답하라> 시리즈가 탄생했다. 그 후 한 예능 전문 제작사에서 고문으로 모셔갔다는 소식이 마지막 버전이다.
주철환 피디는 가르치는데 도가 튼 사람이다. 이화여대에서 교수를 하다가 OBS 사장도 하셨고 jtbc가 개국할 때 예능국을 진두지휘했다.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을 한 후 아주대학교에서 콘텐츠를 가르치며 정년을 앞두고 있다. 현재 <문화일보>에 노래 관련 칼럼을 매주 연재 중이다. 그걸 매번 나에게 톡으로 보내주시고 있다.
1990년대 여의도 MBC라는 같은 공간에 있었던 생각나는 두 사람이다.